주말에 래군이형 면회를 다녀왔다. 나는 감옥 간 박래군을 별로 걱정 안 하는데, 감옥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지독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밥 잘 챙겨먹고 운동 규칙적으로 하고 술 담배 안 하니 건강해질수도 있고, 컴퓨터 스마트폰 없으니 책 읽으면서 생각도 많이 할 수 있다. 물론 케바케여서 감옥에 가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안좋아지는 경우도 있다.
암튼 래군이형은 잘 지내보였고, 그래서 원래부터도 없던 걱정 앞으로도 없을 듯.
<A가 X에게-편지로 씌어진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특별히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고, 소설을 읽고 싶어서 다시 빼들었다. 예전이 읽었던 부분 뒤 쪽으로 읽는다. 감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자연스레 내 감옥 시절이 떠오른다.
감옥 안에서는 모든 감각과 모든 사고가 예리하고 예민해진다. 평소에는 보지 못한 것들,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때 나는 진은영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보고 있었는데, 시집 제목과도 똑같은 제목을 가진 표제시가 마음에 들어 내 나름으로 흉내는 내 보았다. 감옥에서 나만의 사전을 만든 것이다. 사전이라고 하기에는 단어가 몇 개 없지만, 이 단어들이면 당시 수원구치소에서 내 일상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감옥에서 만든 나만의 사전
그리움: 보고 싶은 사람들을 자꾸 떠올리는 일. 그러나 자꾸만 희미해져가는 얼굴들. 외로움: 1.31 평 좁은 방안에서도 철문 밖 넓은 세상에서도 내자리를 찾을 수 없다. 고독: 이 방 안에서 살아있는 건 나와 작은 화분하나. 그런데 화분이 시들어간다. 사랑: 하루종일 오지 않는 너의 편지를 기다렸다. 그래도 언제나 다음날이 또 기대된다. 설레임: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롤러코스터. 떨어질 줄 알면서도. 미움: 내 안에 살고 있는 보기 싫은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내다. 혹은 다른사람에게 투영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이름을 처음 본 건 고등학교 때였다. 아마도 고3 때로 기억하는데, IMF가 온 나라를 휩쓸었고, 울 아버지는 회사가 망해서 퇴직금도 못받고 실업자가 되었고, 나와 동생은 학원 다니던 것을 모두 다 끊어야 했다. 여름방학 때였다. 집에서는 공부가 안 된다는 핑계로 동네 독서실을 다녔는데 아침 먹고 독서실로 가서 만화책과 소설 책을 좀 보다가 11시가 넘으면 어슬렁어슬렁 동네 돌아다니며 오락실에서 오락도 한 판 하고 대충 점심 때 맞춰 집으로 돌아가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라디오에서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를 듣고 노랫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 안치환 5집 테이프를 샀다. 안치환 노래 가사들 중 유독 마음에 드는 가사를 보니 죄다 김남주라는 시인의 시였다. 궁금증이 일어 서점에 가서 책을 찾아보니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옥중시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시집이 있어서 사와 읽기 시작했다. 그 김남주의 시에서 브레히트라는 이름을 아라공, 하이네, 마야코프스키 같은 이름과 함께 만났다.
그들의 시를 읽고
김남주
희한한 일이다 그들의 시를 읽다보면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많이 있다 나무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뿌리가 닮았다고나 할까 소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맛이 닮았다고나 할까 빛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둠을 밀어내는 그 모양이 닮았다고나 할까 나라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에는 영락없이 쌍둥이 같은 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흙이 타고 밤이 타는 냄새와도 같다 그것은 노동의 대지가 파괴되는 천둥소리와도 같다 그것은 투쟁의 나무가 흘리는 피의 맛과도 같다 한마디로 말하자 그들의 시에는 인간이 있는 것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원수지게 하기도 하고 동지이게 하기도 하는 물질이 있는 것이다 그 깊이와 역사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꽃이 있고 이슬이 있고 바람의 숲이 있어 인간 없는 시인 따위는 없다 거기에는 인간이 있되 계급 없는 인간 일반 따위는 없다 거기에는 그들 시에서 십자가와 성경은 하나의 재앙이었다 적어도 가난뱅이들에게는 보라 하이네를 보라 마야코프스키를 보라 네루다를 보라 브레히트를 보라 아라공을 사랑마져도 그들에게는 물질적이다 전투적이다 유물론적이다 그들은 소네트에서 천사를 노래했으되 유방없는 천사를 노래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애시에서 비너스를 노래했으되 궁둥이 없는 비너스를 노래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래했다 꿀맞처럼 달콤한 입술을 술맛처럼 쏘는 입맞춤의 공동묘지를 그들은 노래했다 박꽃처럼 하얀 허벅지를
그 부근에서 은밀하게 장미향을 피워내며
끊임없이 흐르는 갈증의 샘을
나는 자신한다 감히 다른 것은 자신 못해도
밤으로 낮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며
육체의 허무를 탄식하는 도덕군자들도
그들의 시를 읽으면 느끼게 될 것이다
빳빳하게 일어서는 아랫도리의 물질로
나는 자신한다 감히 다른 것은 자신 못해도
플라토닉 러브 어쩌고 저쩌고 하는 순수 여류시인들도
그 시를 읽고 감격해 마지 않는 신사 숙녀 여러분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시를 읽으면
자기들도 관념이 조작해놓은 위선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축축하게 젖어드는 아랫도리의 물질로 알게 될 것이다.
당시 나는 이 세상과 사회가 한참이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넘치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해 삐져나온 감정만은 아니었다. 이재용은 당시에도 일년에 버는 돈이 어마어마했다. 고등학생인 나는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비싼 교육 받은 이재용이 우리 아버지보다 능력은 훨씬 좋겠지만, 그 차이가 수천억 재산과 실직자의 차이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한 사람들이 자기 잘못도 아닌데 일터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상은 이대로는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나는 사회에 대한 분노만 있었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만의 시각도 없었고,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찰나에 만난 김남주의 시는 내겐 문학이라기 보다는 과학처럼 다가왔고,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지에 대한 운동의 방법론처럼 느껴졌다. 시가 혁명의 무기라고 했던 김남주의 말에 나는 푹 빠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시인이 되어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혁명의 무기가 되는 시를. 그때까지만 해도 시인이 되려면 국문과에 가야하는 줄 알았는데 김남주를 보니 국문과 출신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혁명의 무기로서) 좋은 시를 쓰려면 역사의식이 투철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사학과를 선택했다.
대학시절 읽은 브레히트 - 착취와 전쟁의 본질을 파악한 시인
대학에 들어와서도 나는 혁명의 무기가 되는 시를 좋아했다. 박노해와 백무산을 알게 되었고, 오래 전에 김남주의 시집에서 만났던 이름들, 브레히트와 아라공과 하이네, 네루다와 마야코프스티를 찾아 읽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문학을 투쟁의 도구로만 이해하는 교조주의자처럼 보이는데, 오해를 피하자면 나는 학생운동을 하는 동료들에 비해서 문학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었다. 김남주와 박노해뿐만 아니라 기형도와 윤동주의 시를 무척 좋아했고, 김광석과 산울림과 이상은의 가사를 좋아했다. 학년 별로 세미나를 했는데, 우리 학년은 내가 강력하게 주장해서 세미나를 문학작품으로 하기도 했다. 당시 세미나 했던 책이 이제는 딱 두 권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한 권은 518문학인 <꽃잎처럼>이었고 나머지 한 권이 바로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모든 시, 모든 문학, 모든 책에 대한 독서가 마땅히 그러하듯이 나 또한 내가 사는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브레히트의 시를 읽었다. 2000년대 초반은 반전운동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이라크 침공이 초읽기에 들어갔던 시기였다. 당시는 반전 집회가 자주 열렸는데, 나는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브레히트의 시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을 낭독했다. 짧아서 낭독하기 좋기도 하거니와 이 시가 전쟁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베르톨트 브레히트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첫 번재 전쟁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었다.
지난 번 전쟁이 끝났을 때
승전국과 패전국이 있었다.
패전국에서 하층 서민들은
굶주렸다. 승전국에서도 역시
하층 서민들은 굶주렸다. (1936/37년)
당시 정윤경씨가 만들어 부른 '시대'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랫말에도 비슷한 가사가 나왔다.
그 모든 전쟁에서 너희들이 만든 그 모든 전쟁에서
승전국의 병사들과 패전국의 병사들은 너희가 만든 그 더러운 전쟁에서 무엇을 얻었나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영예를 얻었고
다쳐야만 얻을 수 있는 명예도 얻었지
폐품이 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그 고마운 자유도 얻었지.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한국군이 파병을 결정했다. 정부는 국익을 이야기 했지만, 나는 전쟁의 본질은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아니, 이런 시와 노래를 통해서 그런 생각을 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당시 특별히 좋아한 시가 있었는데 바로 <임시 야간 숙소>다.
임시 야간 숙소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각주:1]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1931년)
나는 대학시절을 온전히 민주당 정권에서 보냈다. 99년에 입학했으니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였고, 2003년까지 다녔으니 노무현 대통령 시절도 겪은 셈이다. 지금이야 스스로 진보 혹은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통령 욕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볼 것이냐로 진보진영 안에서도 입장이 갈렸다. 나는 좀 더 비판적인 입장에 속해 있었는데, 민주당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도 컸지만, 약간은 아나키적인 생각도 있었다. 지금의 국가 시스템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결국 지배계급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당시 나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게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사람들을 아주 날카롭게 대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선명하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리하게 더 강한 이야기를 쏟아낸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지금도 생각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이라크 파병과 FTA 도입, 평택미군기지 확장 이전 등을 거치면서 노무현 정부도 인민을 억압하는 정부라는 측면에서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당시처럼 남을 맹비난하는 것으로 내 정체성을 돋보이게 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거다. 아무튼 당시 내가 김대중 노무현을 지지 옹호하는 사람들과 싸울 때 가장 많이 인용했던 시가 바로 <임시야간숙소>다. 좀 너그럽게 당시의 나를 바라봐주자면 잠시 눈을 피할 숙소를 마련하는 것보다 착취의 시대를 짧게 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고, 그걸 조금 세게 과도하게 표출했던 거고, 관심에 비해 공부가 짧았던 거였다.
노동자가 읽은 브레히트 - 권력자들에 저항하는 이들을 위한 질문들
물론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과 <임시 야간 숙소>는 지금도 무척 좋아하는 시다. 그런데 최근에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으면 또 다른 시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내게 브레히트의 시 가운데 어떤 시가 가장 좋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 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된 바빌론
그 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일으켜 세웠던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찬란한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에는
개선문이 많기도 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개선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도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린 날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또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하나씩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1939년)
이 시가 마음에 와 쿵, 하고 박힌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내가 책 읽는 노동자가 되었고,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 그러니까 학생운동을 할 때와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할 때, 내가 맞서 싸운 권력은 인격화되지는 않았다. 국가나 자본, 혹은 군사주의 같은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실행하는 주체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라거나 국가라거나 군사주의는 아니었다. 대통령조차도 행정부의 수반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을 뿐이고, 무엇보다 내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거나 삶이 겹치는 지점이 없었기 때문에 한 명의 인격이라기보다는 그냥 '대통령'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회사에 들어오면서 나는 인격화된 권력의 정점을 맞딱뜨리게 되었다. 내 처지가 노동자가 되어보니 그 전까지는 관념적인 차원에서 노동자와 연대한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죄다 내가 겪은 일처럼 느껴지던 시기다. 분명 회사의 상품은 우리 모두의 공동의 노동으로 일궈낸 성과인데 대표이사는 그것이 온통 자기 혼자 일궈낸 것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했다. 분명 그 성과에 대표이사의 몫이 적지 않게 포함되었겠지만, 천하의 알렉산더나 시저도 승리하는데 취사병과 함께 했는데 말이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도, 보리의 세밀화 도감 시리즈도 모두 출판 노동자들의 땀과 시간이 배어 있는 것들인데 어쩐지 박맹호 혼자서, 윤구병 혼자서 그것들을 이뤄낸 것처럼 말하는 게 마뜩찮았다. 내게는 이 시가 노동자의식이라는 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였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은 노동조합 활동으로 이어졌다. 우리들에겐 의문이었지만 경영진에겐 해사행위였던 거 같다. 대답을 들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대답 대신 우리가 마주한 건 일방적인 경영판단과 업무지시였다. 그들은 여전히 그 성과가 자기들만의 힘으로 일궈낸 것으로 여겼다. 진시황과 필립왕과 프리드리히2세도 하지 못했던 것을 말이다. 대답을 스스로 찾아야 겠다고 생각했고,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인격화된 권력들의 민낯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서글플 정도로 무식했고 그 무식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되기 때문이었다. 임금협상을 하나 하더라도 우리는 근거와 논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자료를 찾고 계산기를 두드렸지만 회사는 아무런 준비도 노력도 하지 않았다. 노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은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추측컨대, 당신들은 백만장자인 모양이다.
당신들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다. - 미래가
당신들 앞에 환히 보인다. 당신들의 부모는
당신들의 발이 돌멩이에 부딪히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러니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지금 그대로
계속해서 살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시대가 불안하여, 내가 들은 대로,
어려운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만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말해 줄 당신의 안내자들이 있다.
어떤 시대나 타당한 진리와
언제나 도움이 되는 처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은 모든 요령을 수집해 놓았을 것이다.
당신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당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에 사정이 달라진다면
물론 당신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1932년)
배움을 찬양함
베르톨트 브레히트
가장 단순한 것을 배워라! 자기의
시대가 도래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너무 늦은 것이란 없다!
알파벳을 배워라,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우선 그것을 배워라! 꺼릴 것 없다!
시작해라! 당신은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배워라, 난민 수용소에 있는 남자여!
배워라, 감옥에 갇힌 사나이여!
배워라, 부엌에서 일하는 부인이여!
배워라,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이여!
학교를 찾아가라, 집없는 자여!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묻기를 서슴지 말아라, 친구여!
아무것도 믿지 말고
스스로 조사해 보아라!
당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모르는 것이다
계산서를 확인해 보아라!
당신이 그 돈을 내야만 한다.
모든 항목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물어보아라, 그것이 어떻게 여기에 기어들게 되었나?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1931년)
지난 대선 때 당시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TV토론을 보면서 나는 내가 경험한 단협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박근혜 후보의 무식함을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나는 그 무식함이 너무나 무서웠다. 사람들은 그녀의 무식함이 국정을 운영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녀가 무식해도 되는 까닭이, 다시 말해서 배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그 이유가, 즉 그녀가 가진 막대한 권력이 국정을 운영하는 데 아주 독선적이고 거침없는 태도를 취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브레히트가 김남주처럼 시를 혁명의 무기로 적극적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시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시에 사회적인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마지막으로 브레히트의 시 한 편만 더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사실 브레히트가 정말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까닭은 그의 시가 혁명의 정신을 끝까지 올곧게 지켜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혁명이 정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섬기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해결방법
베르톨트 브레히트
6월 17일 인민봉기가 일어난 뒤
작가 연명 서기장은 스탈린 가街에서
전단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어 버렸으니
이것은 오직 2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 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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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에서 일어난 인민봉기에 대한 당국의 억압조치를 시인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음.
토요일 나는 광화문에 못가서 경찰이 어땠는지 시위대는 어땠는지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다만 내 친구들의 이야기와 그동안 정부와 공권력, 보수 언론이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에 대한 경험으로 추측할 뿐이다.
합법, 불법에 대해서 그리고 폭력과 비폭력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다.
1.
먼저 불법과 합법.
역사적인 사례들을 예로 들어보자.
합법적인 행동
철도노조 파업, MBC노조 파업, 통합진보당 해산, 나치의 집권
불법적인 행동
3.1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516쿠테타, 전두환의 쿠테타
민주주의를 촉진
철도노조 파업, MBC노조 파업, 3.1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민주주의에 역행
통합진보당 해산, 나치의 집권, 516쿠테타, 전두환의 쿠테타
어떤 행동이 불법인지 합법인지는 그 행동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냐와는 별개다. 합법적이지만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동도 있고, 불법이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확장하는 행동도 있다. 심지어 시민불복종은 불의의 법을 고발하기 위해 일부러 법을 어기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펼치는 방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시민불복종으로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미국의 흑인민원 운동가들이 펼친 불복종 시위가 있는데, 우리는 아무도 그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백인전용 식당에 들어가서 앉은 것이 당시 법을 어긴 불법적인 행동이었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불법 행동만이 더 뛰어난 투쟁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법이 정한 절차를 거친 노동조합의 파업처럼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펼치는 투쟁도 굉장히 효과적일 수 있고, 때로는 불법을 무릅쓴 투쟁 방식은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를 제한하기도 한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불법시위와 합법시위를 도덕적인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 어떤 행동이 민주주의를 위한 행동인지, 그리고 행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2.
무엇이 폭력인가?
나는 기본적으로 폭력 투쟁보다는 비폭력 투쟁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성공가능성도 높으며, 투쟁 과정 또한 민주적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비폭력일까?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예컨대 (옳고 그름의 문제는 따지지 않는다면) 쇠파이프로 전경을 때리는 것은 폭력이라는 데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태극기를 불태우는 건 폭력일까 비폭력일까? 전경 버스는 부수는 건 폭력일까 비폭력일까?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고, 강정마을에서 활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평화활동가 앤지 젤터는 1990년대에 동료들과 함께 공군 기지에 잠입해서 망치로 호크기를 때려부쉈다.(전쟁없는세상 37호: 비폭력 직접행동 무죄 사례 살펴보기) 한국이었다면 그 행동을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봤을까? 엔지 젤터와 동료들은 그 행동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비폭력 평화운동의 상징인 간디는 칼을 든 강도 40명에게 둘러싸인 사람이 칼을 들고 방어한다면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행동에 대해 폭력과 비폭력을 명확하게 가르는 절대적인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집회나 시위가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규정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더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을 수 있고(소수에게 집중된 힘에 기반한 저항 운동은 또 다른 권력 집단을 만들게 된다),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우리의 저항 속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모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가지고 논쟁할 게 아니라, 어떤 저항이 우리에게 가장 유용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지를 가지고 토론해야 한다.
태극기를 불태운 행동이나 전경 버스에 물리적인 힘을 가한 행동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비폭력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누군가는 폭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이게 폭력인지 비폭력인지를 따지고 들어가봤자 남는 게 없다는 거다. 우리가 해야할 토론은 그 행동들이 과연 세월호 1주기 집회의 목표에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세월호 1주기 집회의 목표가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를 공유해야 할 것이다. 저항에 나서는 집단이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면 그 저항은 성공할 수 없다.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를 위해 좋은 저항이었는지를 따지고, 목표가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할지를 토론하는 게 생산적이다.
결론은 어떤 저항 행동에 대해 불법인지 합법인지를 따져봤자 그 행동이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고, 폭력 비폭력을 따지는 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거라는 거.
어떤 사람이 잘못을 한 번 했다고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매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한 번 이면에 숨어있는 무수히 많은 잘못을 바라봐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하나의 잘못만 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봐야한다는 말은 옳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장애를 가진 유색인종 이주여성 비정규직 성소수자 노동자이자 왼손잡이에 기타 등등... 이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것은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인간은 모두 그래"라며 면죄부를 주자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는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고 여기서 시작해야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위치에 서 있기도 하고,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할 때도 있고,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할 때도 있다. 정말로 큰 잘못은 잘못을 한 바로 그 시점이 아니라 그 뒤에 일어난다. 반성하지 않는 것, 사과하지 않는 것, 문제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다.
내가 알기에 적어도 한홍구 상임이사는 평화박물관 활동가들이 집단 사직한 사건에 대해 어떤 종류의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다. 여러 루트로 전해들은 바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공식적으로도 그는 자기가 마음에 안 드는 활동가를 해고하는 것에 반발에 활동가들이 모두 사임한 일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식의 이야기도 한 적이 없다. 나는 당시 정말이지 한홍구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한홍구 상임이사가 활동가를 부당해고 했다고 해서, 그가 교수직에서 물러나야한다거나 그의 전공분야에 대한 대중강연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부분은 사람마다 의견이 많이 다를 거 같은데, 같이 이야기를 나눠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홍구가 다른 것도 아닌, 노동의 문제를 진보적인 시각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이나 불편하다. '평화의 눈으로 본 노동'이란 제목으로 강의도 하던데 나는 그가 적어도 노동에 대해서는 강의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아주 소수일 거다.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홍구의 글이 서글픈 절망감으로 다가온 건 그때문이다. 해고한 사람은 여전히 진보진영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호소하고 있고, 그에게 해고당한 활동가는 한겨레 신문을 통해 한홍구의 아름다운 말을 읽는다. 그리고 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홍구의 글은 분명 노동자들의 싸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가 해고한 노동자(혹은 활동가)들만 빼고는 말이다.
사실 이런 케이스는 비일비재하다. 진보 진영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조직을 떠나는 건 가해자가 아니다. 약자가 떠나게 된다. 이게 바뀔 거 같지 않다. 평화박물관 사직 활동가들은 앞으로도 한겨레에서 한홍구의 글을 읽어야 할 거고, 나와 내 옛동료들 선배들은 한겨레에서 윤구병의 글을 읽어야 할 거다.
그리고 또 하나 서글픈 까닭. 윤구병은 내게 그냥 나쁜 사장이었다. 나는 그를 처음 본 게 보리출판사에서였고, 우리의 관계는 늘 사장과 노동자였으니 그의 다른 모습은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가 나쁜 사장이라는 것. 그래서 그가 나쁜 사장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나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한홍구는 병역거부 운동을 함께 해 온 동료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다. 감옥에 갔다와서 인사드리러 가기도 했다. 분명 병역거부운동에 그리고 나에게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를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쓰는 건 참 마음 아픈 일이다. 지금은 그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그와 함께한 시절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는 게 결코 편하지 않다.
<1968년 2월 12일 - 베트남 퐁니 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한겨레출판, 2015
11쪽
'기억의 자격'을 생각한다. 1968년 12월 9일 울진, 삼척에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9살 이승복 군의 입을 찢어 죽였다.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을 지닌 기억이다. 1968년 2월 12일 퐁니, 퐁넛에 진입한 한국군 해병대원들이 6살 응우옌득쯔엉 군의 입에 총을 쏘아 죽였다. 한국인들은 잘 모른다. 배제된 기억이다. 자격을 얻지 못하고 따돌림당한 기억이다. 잊으면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나라도 나서 특별하게 기억해주고 싶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복원해주고 싶었다. 베트남과 연결된 1968년은 대한민국의 어떤 원점이다. 비밀스런 기원이다. 북한보다도 못 살던 한반도 남쪽의 농업국가는 어떻게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3위(2014년)의 경제대국이 되었는가. 박정희는 어떻게 자신의 장기집권 플랜과 경제 개발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며 대한민국을 견고한 병영국가로 만들었는가. 이 책이 완전한 해답을 선물하진 못하지만 어떤 암시를 줄 것이다.
41쪽
하루 사이, 대한민국 서울과 베트남 투이보 마을에서 습격 사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최고 권력기관의 심장부를 향했고, 하나는 민가를 향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드러내는 서술
49~53쪽
그날은 1968년 2월 7일이었다. 제대 일자를 손꼽아 기다려온 군인들에게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전 장병 제대 보류! 일주일 뒤엔 군 복무 기간을 6개월 늘리는 방침이 발표됐다. 육군과 해병대는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공군과 해군은 3년에서 3년 6개월로 늘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2월 7일 "올해 안에 250만 재향군인 전원을 무장시키고 그에 필요한 무기공장을 연내에 건설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는 4월 1일 향토예비군대 창설로 이어졌다. 존슨 대통령이 2월에 지원키로 결정한 군사원조자금 1억 달러 중 절반이 여기에 사용됐다. 지역마다 예비군 무기고가 설치됐다. 1년 뒤인 1969년부터는 고등학교(주 2시간, 연 68시간)와 대학(주 2시간, 연 60시간)에서 교련 수업이 시작됐다.
(중략)
11월 21일엔 시도민증 제도가 폐지되고 주민등록증 제도가 시행되었다. 18살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13자리 번호가 부여되고, 죽을 때까지 이 주민등록증을 휴대할 의무가 생겼다. 북한 특수부대원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주민등록법 개정안의 국회 처리가 급물살을 탄 결과였다. 12월 5일엔 국민교육의 기본이념이라는 국민교육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선포됐다. 초중고등학생들은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로 시작하는 600자짜리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달달 외워야 했다. 일부 학교에선 학생들이 그 전문을 완벽하게 외울 떄까지 집에 보내주지 않았고 체벌을 가했다.
(중략)
1968년은 대한민국 병영화의 기틀이 마련된 해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은 1948년 8월 15일이지만, 군사정부의 진정한 수립은 김신조가 청와대 앞까지 내려온 1968년 1월 21일로부터 시작됐다. 사회 각 부문의 군사체제와 군사교육을 위한 인프라가 착착 깔렸다. 베트남 전선에 투입된 5만 대군이 미국으로부터 군사비를 뜯어오는 가운데, 현역 복무 기간 연장과 향토예비군 창설, 교련 실시 등을 기본으로 하는 군대식 시스쳄이 사람들의 일상에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
이 모든 것은 김신조 때문이었을까. 김신조를 보낸 북한 때문이었을까. 1967~1968년 남북한 간의 군 교전 횟수가 이전보다 10대 이상 증가했지만 전부 북한의 선제공격은 아니었다. 남북 간 충돌의 최소한 3분의 1은 남한 정부의 도발이었다 .
박정희에겐 지속적인 위기가 필요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군사정권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박정희 때문이기도 했다 1968년은 베트남 반전운동을 고리로 혁명의 불꽃이 세계 도처에서 타오르던 해였다. 베트남전에 참가해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 섰던 대한민국의 1968년은 희미한 불꽃이 일렁이는 암흑이었다.
316쪽
1967년 봄, 파리에서 경험했던 대중집회도 평화운동에 헌신하며 살겠다고 결심하는 중대 전기가 됐다. 그는 수백 명이 모인 이 집회 도중 손을 들고 연단에 나가 당시 베헤이렌의 이슈였던 한국인 병사 김동희에 관해 발언했다. 김동희는 1965년 7월 베트남전 파병 명령을 거부한다며 부산의 육군 병기학교를 탈영해 8월 대마도로 밀항한 한국군 병장이었다. 일본 망명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후쿠오카형무소를 거쳐 오무라수용소에 갇혔다. 베헤이렌은 김동희의 한국 강제 송환을 반대하며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중이었다. 다카하시가 파리의 집회에서 언급한 김동희의 처지는 좌중들의 공감을 얻었다 한 시간 뒤엔 집회의 정식 의제로 채택됐다. 집회 주최 쪽은 즉석에서 김동희와 관련해 한국 정부에 보내는 항의성명 문안까지 만들어 발표했다. 국제연대의 힘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는 비폭력 행동이 "상대방 힘의 원천을 서서히 붕괴시켜 변화를 일으키도록 고안된 항의와 설득, 비협력과 비폭력 개입 같은 행동으로 구성된다"라고 말한다. _375쪽
샤프는 비폭력 행동을 통한 성공이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첫째 방식은 화해(상대방이 상황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지만 그럼에도 일정 부분, 또는 전부를 넘겨주는 것이 평화를 이루고 손실을 줄일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을 때)이고, 둘째 방식은 비폭력 강압(상대방이 투쟁을 계속하고 싶어 하지만 힘이 바닥나고 통제 수단을 잃어서 더 이상 투쟁을 이어갈 수 없을 때)이며, 셋째 방식은 회심(상대방의 마음이 바뀌어 비폭력 활동가들이 바라는 변화를 수용하는 정도까지 되었을 때)이다. _380쪽
1981년 보수당 회의에서 노먼 테빗은 자신의 부친이 "자전거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나섰고 찾을 떄까지 계속 찾아다녔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영국의 산업이 해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는 엄청나게 증가한 실업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자전거를 타라"는 말은 대처리즘을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는 국가적인 상투어가 되었다. 그 말은 특히 실업자들이 정부가 떠넘긴 문제들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런 생각에 비추어 실업수당은 삭감되었고 더이상 소득에 따라 증가하지 않았다.
이 책의 메세지와 별개로 나는 저 문장에서 '자전거'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자전거는 생태적 실천과 자동차 사회의 대안적인 의미가 강한데, 또 다른 사회에서는 저렇게 자전거가 신자유주의의 상징으로 노동계급을 공격하는 말이 될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