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라디오  
Front Page
Tag | Location | Media | Guestbook | Admin   
 
'소년이 온다'에 해당하는 글(3)
2016.05.17   [서평] 도청에 남은 그들은 왜 총을 쏘지 않았을까? 1
2014.08.07   <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2014
2014.08.06   죽음에 대하여. 1


[서평] 도청에 남은 그들은 왜 총을 쏘지 않았을까?

대학생 때 일이다. 학생운동을 함께 하는 동기들과 합숙을 갔다. 당시 내가 속한 학생운동 조직은 맑스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이었다.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혁명을 꿈꿨고, 자본가들이 권력을 그냥 내려놓을 리가 없기 때문에 혁명의 순간에는 폭력을 수반한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깊게 생각한 건 아니고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그 해에 우리 조직이 역량을 집중하기로 한 활동은 바로 병역거부 운동이었다. 조직의 몇몇 선배들은 병역거부 선언을 했고, 나와 내 동기들 중 몇명은 영장이 나오면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예비병역거부 선언을 했었다. 

합숙을 하면서 역사, 정치, 철학 등등을 공부하고 토론도 했는데, 한 번은 병역거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혁명의 순간에는 폭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와 병역거부를 선언한 우리가 충돌했다. 총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자니 오지도 않을 혁명이 걱정되었고, 혁명을 위해 총을 들겠다고 말하자니 병역거부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모두 갈팡질팡했다. 

지금이야 우문에 현답을 할 수 있지만 당시 나는 정말 평화주의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병역거부 소견서에도 썼다시피 나는 평화주의자라서 병역거부를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병역거부자가 되고 나서 평화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니 말이다. 


사실 언제 어떻게 올지도 모르는 혁명의 순간을 고민하는 건 어쩌면 덜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나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은 이런 거였다. "그렇다면 너의 양심은 80년 광줴서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계엄군과 싸우던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하는데?" 이건 병역거부자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 나를 당혹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당시 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의 모습이 견결한 신념을 가진 투사의 모습처럼 느껴졌다기보다는 끝내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부응한 사람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죽음이 혁명운동의 씨앗이 되어 훗날 피어오를 거라는 믿음을 가진 분들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도청에 남았던 분들이 많지 않았을까?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감히 말하자면 나는 그분들의 행동이 병역거부자들의 병역거부와 유사점이 있다고 느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런데 행동의 양상은 정반대였다. 도청에 남은 분들은 총을 들었고, 병역거부자들은 총을 거부했다. 이 대비가 나를 당혹하게 했다. 병역거부자와 오월 광주는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걸까? 그렇다면 병역거부자인 나는 오월 광주, 특히나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킨 분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지?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나는 소설 속에서 찾았다. 맨부커상 수상했다고 떠들썩한 소설가 한강이 쓴 오월 광주에 대한 소설 <소년이 온다>가 바로 그 소설이다. 꽤나 몰입해서 읽었고, 가슴에 깊게 남는 구절도 여러 군데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 내게 가장 인상깊은 구절은 도청의 마지막 밤을 묘사한 구절이었다. 


  아니요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117)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병역거부와 오월 광주가, 도청에 끝까지 남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불현듯 깨달았다. 아니 내가 깨달은 게 아니다. 소설이 보여준 것을 나는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정말로 그랬는지, 소설가 한강이 들은 이야기인지, 아니면 창작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 도청에 남은 이들. 아마도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는 걸 예감했을 것이다. 저 눈앞의 계엄군을 쏘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박노자는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에서, 2차 대전 당시 군인들의 조준 사격율이 15%로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죽이는 일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당시 도청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소설처럼 손에 쥔 총을 쏘지 않았거나, 하늘을 향해 총을 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만 같다. 


만약 내가 오월 광주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면, 그러면서 병역거부자였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내가 과연 오월 광주에 살았다면, 도청에 끝까지 남을 수 있을지. 지금 생각으로는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도청에 남지는 못했을 거 같다. 그렇더라도 오랫동안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던 이 질문에 이제는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도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을 거라고. 총을 들고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총을 쏘지 않으면서 계엄군과 싸웠을 거라고. 그들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을 거라고. 












<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2014

<108쪽>

그와 나의 경험이 비슷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혼자서 겪은 일들을 그 자신에게서 듣지 않는 한, 어떻게 그의 죽음이 부검될 수 있습니까?


기록이란 애초에 가능한 것일까?


<114쪽>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병역거부의 양심에 대해 생각하다 



<117쪽>

  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기억하라고 나에게 말할 권한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오월 광주와 병역거부의 만남 


<120쪽>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노동조합 활동을 스스로 기록하는 까닭

'책갈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A가 X에게: 편지로 씌어진 소설>  (0) 2015.0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 홍은전, 까치수염, 2014  (0) 2014.12.15
죽음에 대하여.  (1) 2014.08.06
한국 탈핵  (0) 2014.02.06
이 폐허를 응시하라  (0) 2014.01.31


죽음에 대하여.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보고 나서 <노동자, 쓰러지다와> <소년이 온다>를 함께 보고 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아우슈비츠의 죽음과 산업재해와 518의 죽음이 세월호의 죽음들과 뒤벅범이 된다. 


불에 타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총에 맞어 죽고, 가스실에서 죽고, 용광로에 뼈째 녹아서 죽고. 죽음의 양상은 다르지만, 이 죽음들 맞닿은 지점에서  두 가지가 눈에 박힌다. 


이 죽음들은, 구조적인 죽음이다. 생명활동의 일부로서 죽음 같은 게 아니다. 예전 같으면 국가폭력이라고 쉽게 이야기 했을 텐데, 지금은 국가 폭력이라고 쉽게 말하고 싶지 않다. 국가 폭력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국가 폭력이라고 말해버리면 너무 단순화하는 거 같다. 폭력에 죽어간 사람들의 삶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을 죽인 폭력도 아주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결국 이 죽음들은 나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다"(소년이 온다, 95

쪽) 이 질문은 결국 죽음에서 시작했지만, 죽음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전반에 걸쳐진 질문으로 확장해야 한다. 



BLOG main image
 Notic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81)
노동일기 (14)
생활일기 (21)
책갈피 (38)
기고글 (8)
계획적 글쓰기 (0)
 TAGS
효과적인 집회 멀고도 가까운 병역거부 김상봉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콩장이 가장 맛있어 누가 죄인이 되는가 혁명의 무기 노동자 경영권 아렌트의 정치 민주적인 시위 비폭력 트레이닝 에이프릴 카터 슬램덩크에서 배운다 고통에 관하여 채식하는 사람은 번데기 먹으면 안 되나요? 레베카 솔닛 정부가 인민을 해산해 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병역거부와 오월 광주 불법 투쟁과 합법 투쟁 불행을 경쟁하는 운동 진짜 민주주의 한국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고찰 아빠가 사준 게임기 죽음의 상인 청국장 먹고 체한 이야기 내 인생의 음식 엄마가 사준 게임팩 최고의 도시락 반찬 출소 한 달 전 폭력 시위와 비폭력 시위 빨래하는 페미니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슈퍼콤을 아시나요?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소년이 온다 직접행동 수원구치소 음식 최악 작은 집단의 독재자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Entries
 Recent Comments
 Archive
 Link Site
 Visitor Statistics
Total :
Today :
Yesterday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