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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와 오월 광주'에 해당하는 글(1)
2016.05.17   [서평] 도청에 남은 그들은 왜 총을 쏘지 않았을까? 1


[서평] 도청에 남은 그들은 왜 총을 쏘지 않았을까?

대학생 때 일이다. 학생운동을 함께 하는 동기들과 합숙을 갔다. 당시 내가 속한 학생운동 조직은 맑스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이었다.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혁명을 꿈꿨고, 자본가들이 권력을 그냥 내려놓을 리가 없기 때문에 혁명의 순간에는 폭력을 수반한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깊게 생각한 건 아니고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그 해에 우리 조직이 역량을 집중하기로 한 활동은 바로 병역거부 운동이었다. 조직의 몇몇 선배들은 병역거부 선언을 했고, 나와 내 동기들 중 몇명은 영장이 나오면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예비병역거부 선언을 했었다. 

합숙을 하면서 역사, 정치, 철학 등등을 공부하고 토론도 했는데, 한 번은 병역거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혁명의 순간에는 폭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와 병역거부를 선언한 우리가 충돌했다. 총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자니 오지도 않을 혁명이 걱정되었고, 혁명을 위해 총을 들겠다고 말하자니 병역거부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모두 갈팡질팡했다. 

지금이야 우문에 현답을 할 수 있지만 당시 나는 정말 평화주의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병역거부 소견서에도 썼다시피 나는 평화주의자라서 병역거부를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병역거부자가 되고 나서 평화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니 말이다. 


사실 언제 어떻게 올지도 모르는 혁명의 순간을 고민하는 건 어쩌면 덜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나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은 이런 거였다. "그렇다면 너의 양심은 80년 광줴서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계엄군과 싸우던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하는데?" 이건 병역거부자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 나를 당혹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당시 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의 모습이 견결한 신념을 가진 투사의 모습처럼 느껴졌다기보다는 끝내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부응한 사람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죽음이 혁명운동의 씨앗이 되어 훗날 피어오를 거라는 믿음을 가진 분들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도청에 남았던 분들이 많지 않았을까?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감히 말하자면 나는 그분들의 행동이 병역거부자들의 병역거부와 유사점이 있다고 느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런데 행동의 양상은 정반대였다. 도청에 남은 분들은 총을 들었고, 병역거부자들은 총을 거부했다. 이 대비가 나를 당혹하게 했다. 병역거부자와 오월 광주는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걸까? 그렇다면 병역거부자인 나는 오월 광주, 특히나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킨 분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지?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나는 소설 속에서 찾았다. 맨부커상 수상했다고 떠들썩한 소설가 한강이 쓴 오월 광주에 대한 소설 <소년이 온다>가 바로 그 소설이다. 꽤나 몰입해서 읽었고, 가슴에 깊게 남는 구절도 여러 군데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 내게 가장 인상깊은 구절은 도청의 마지막 밤을 묘사한 구절이었다. 


  아니요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117)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병역거부와 오월 광주가, 도청에 끝까지 남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불현듯 깨달았다. 아니 내가 깨달은 게 아니다. 소설이 보여준 것을 나는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정말로 그랬는지, 소설가 한강이 들은 이야기인지, 아니면 창작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 도청에 남은 이들. 아마도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는 걸 예감했을 것이다. 저 눈앞의 계엄군을 쏘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박노자는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에서, 2차 대전 당시 군인들의 조준 사격율이 15%로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죽이는 일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당시 도청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소설처럼 손에 쥔 총을 쏘지 않았거나, 하늘을 향해 총을 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만 같다. 


만약 내가 오월 광주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면, 그러면서 병역거부자였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내가 과연 오월 광주에 살았다면, 도청에 끝까지 남을 수 있을지. 지금 생각으로는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도청에 남지는 못했을 거 같다. 그렇더라도 오랫동안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던 이 질문에 이제는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도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을 거라고. 총을 들고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총을 쏘지 않으면서 계엄군과 싸웠을 거라고. 그들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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