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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에 해당하는 글(38)
2020.04.01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권김현영 엮음, 교양인, 2017 1
2020.03.01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자크 파월 지음, 박영록 옮김, 오월의봄, 2019
2020.02.10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박노자, 한겨레출판, 2012
2020.01.19   화성의 인류학자, 올리버 색스, 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 2005년
2019.12.03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권김현영, 휴머니스트, 2019
2017.12.27   <랩걸-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알마, 2017
2017.05.06   뉴턴의 무정한 세계-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 정인경, 돌베개, 2014
2016.06.10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2016.05.17   [서평] 도청에 남은 그들은 왜 총을 쏘지 않았을까? 1
2015.12.17   <직접행동> 에이프릴 카터, 교양인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권김현영 엮음, 교양인, 2017

53쪽 

1970년대 중반 영국에서 계급 이동이 좌절된 하층 계급 남성 노동자들의 하위 문화 중 하나가 '아무것도 안 하기(doing nothing)'이다. 그들은 왜 계급 상승을 위해 애쓰지 않을까. 그들은 왜 아까운 시간을 죽이고 있을까. 그들은 왜 공부도 하지 않고 노동도 하지 않고, 뭔가 재미를 추구하려 하지 않고 그냥 길거리에 앉아서 우유 갑이나 던지면서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를 지르거나 대화도 아닌 서로의 소음을 견뎌 가면서 친구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안 하기'는 '강하지만 강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로서 일종의 남성 되기 전략이다. "나는 진짜 쓰레기이고 난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기가 루저라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만, 사실 마음속으론 자기는 굉장히 다른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자크 파월 지음, 박영록 옮김, 오월의봄, 2019

132쪽 

1940년에 기업과 은행에서 올린 수익은 "전례 없이 높은 수준으로 수직 상승"했다. 이는 나치 당국을 다소 당황케 했던 듯하다. 그들은 대중 사이에서 '전쟁으로 폭리를 취한자'들을 상대로 한 분노가 번지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에서 1918년 사이에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나치 당국은 1941년 중반 법인세율을 4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높여야겠다고 판단했고, 1942년 1월에는 50퍼센트에서 55퍼센트로 재차 인상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박노자, 한겨레출판, 2012

231쪽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엔 모든 참전국에서 교회와 정당, 언론이 전쟁을 열렬히 부추겼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용감하게 돌진해서 적을 사살하는 데 열정을 보이는 모범 전사'는 전체 군인의 10%에 불과했다고 한다. 연구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미국의 유명한 군사 연구자 새뮤얼 마셜(Samuel Marshall, 1900~1977)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실제로 방아쇠를 당겨 의식적으로 가시권에 있는 적눈 병사를 사살하거나 사살을 시도한 미국 군인은 대략 15~20%에 불과헀다. 



화성의 인류학자, 올리버 색스, 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 2005년

28~29쪽

프리먼 다이슨은 종종 자연의 상상력이 인간의 상상력보다 훨씬 풍부하다고 이야기하면서 물질계와 생물계의 풍요로움, 물리적 형태와 생명체의 끝없는 다양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의사인 내 입장에서 말할 것 같으면 자연의 풍요로움은 거강과 질병의 측면, 인가과 인간이 만든 조직들이 인생의 도전과 변화를 맞닥뜨렸을 때 어떤 식으로 끊임없이 적응하고 스스로 재건하는지의 측면에서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결함, 장애, 질병은 역설적인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던 잠재적인 능력, 성장, 진화, 삶의 형태가 이로 인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질병의 역설적인 측면과 숨겨져 있는 '창의력'이다. 

어떤 사람은 발당장애나 질병의 습격을 받으면 겁에 질리지만 어떤 사람은 창조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이로 인해 특정 궤도나 행동양식이 파괴되면 새로운 길과 방식을 만들어 뜻밖의 발전과 진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신경계가 억지로 움직인다. 나는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환자들에게서 이러한 질병의 이면을 접했으며 이 책에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권김현영, 휴머니스트, 2019

-91쪽

서구화된 눈으로 인권의 보편성과 국제법의 준수를 이야기할 때, 여성과 인권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여성해방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인도의 사티 풍습은 인도의 가족법과 상속제도의 부계혈통주의를 없애야만 철폐될 수 있다. 태국의 아동 성매매 문제는 유럽 관광객의 소비로 부를 창출하는 것을 핵심 동력으로 삼고 있는 태국의 경제구조 자체에 도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특수로 보고, 그 안에 있는 여성들을 서구 여성의 기준에서 호명할 때, 우리는 종종 보편적 인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른 종류의 폭력을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우리"에 대한 기대와 희망, 연대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는 측면에서 강력하고도 유용한 개념이다. 그 때문에 인권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자고 하는 것은 인권의 불가능성을 사고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권이 좀 더 정치적으로 강력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 혹은 성적 선택과 매개되지 않은 관계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러한 관계맺음 자체가 인간이 무엇인지를 결정해 준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관계의 맥락성을 경유하여 구체적인 개입의 지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랩걸-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알마, 2017

11쪽

자, 당신의 이제 과학자다. 사람들은 과학자라고 불리려면 수학을, 혹은 물리나 화학을 잘해야 된다고 말할 것이다. 틀렸다. 그런 말은 뜨개질을 하지 못하면 주부가 되지 못한다거나 라틴어를 모르면 성경을 연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런 것을 잘하면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나중에도 공부할 시간은 충분하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질문이다. 


19쪽 

무엇을 고장나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고치지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 정인경, 돌베개, 2014

81~83p

서양의 근대과학은 중세사회의 낡은 질서를 뒤엎고 새롭게 등장한 지식이었다. 과학을 말할 때 앞에 붙은 두 가지 수식어, '서양'과 '근대'는 과학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과학을 모르는 역사가는 근대를 말할 수 없다고 했을 만큼 과학은 근대 시대를 연 주역이었다. (중략)
모든 혁명은 과학혁명에서 시작되었다.(중략)
과학은 자연의 수학화였다. 자연현상을 양적인 요소로 수량화하고 이 요소들을 수학적 법칙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연세계를 기계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인다고 보고 물질과 운동으로 환원시켰다. 살아 있는 동물이나 식물이 나타내는 개별적이고 질적인 요소들은 모두 삭제했다. 동물과 식물은 하나의 사물로 추상화되었고, 자연현상은 수학적 법칙에 종속되었다. 근대과학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과학은 17세기 유럽이라는 시대에 세계를 이해한 방식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중략)
근대과학은 태생적으로 과학주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과학이 가진 보편적 특성은 유럽을 상대적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관점에서 보도록 부추겼다. 유럽인들은 과학이 유럽이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보편적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41쪽

"한밤중에 잠에서 깨곤 해...... 누군가 옆에서...... 울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여전히 전쟁터에 있어......

우리 군이 퇴각하는 중이었는데...... 스몰렌스크 근교에서 어떤 여인이 나한테 자기 원피스를 갖다주더라고. 그래서 얼른 그걸로 갈아입었지. 우리 부대에 여자는 나밖에 없었어...... 다 남자병사들이었지. 평소엔 바지를 입었는데, 그날따라 여름 원피스를 입은 거야. 그런데 하필 갑자기 그게 터졌지 뭐야...... 생리가.......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예정일보다 이른 때였어. 너무 부안하고 또 너무 속을 끓여서 그랬던 거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세상에, 얼마나 창피하던지! 정말 말도 못하게 수치스러웠지! 우리는 잠자리도 여의치 않아서 닥치는 대로 아무데서나 잠을 잤어. 덤부 아래서도 자고, 도랑 속에서도 자고, 나무 그루터기 위에서도 자고. 숲속은 위들이 자기엔 잠자리가 늘 부족했지. 우리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 행군했어. 조국에 속을 만큼 속았다는 생각에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지...... '대체 우리 비행대는 어디 있고 우리 탱크는 어디 있는 거지?' 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땅바닥을 달려가고, 쾅쾅거리는 것은 죄다 독일군이었으니까.

그러다가 포로로 잡혔어. 포로로 북잡히기 바로 전날 나는 두 다리가 모두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지......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얼마나 피를 ㅁ낳이 흘렸던지 온몸이 내 피로 흥건하게 젖었어...... 무슨 힘으로 밤에 숲까지 기어갔는지 몰라...... 우연히 나를 발견한 빨치산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서평] 도청에 남은 그들은 왜 총을 쏘지 않았을까?

대학생 때 일이다. 학생운동을 함께 하는 동기들과 합숙을 갔다. 당시 내가 속한 학생운동 조직은 맑스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이었다.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혁명을 꿈꿨고, 자본가들이 권력을 그냥 내려놓을 리가 없기 때문에 혁명의 순간에는 폭력을 수반한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깊게 생각한 건 아니고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그 해에 우리 조직이 역량을 집중하기로 한 활동은 바로 병역거부 운동이었다. 조직의 몇몇 선배들은 병역거부 선언을 했고, 나와 내 동기들 중 몇명은 영장이 나오면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예비병역거부 선언을 했었다. 

합숙을 하면서 역사, 정치, 철학 등등을 공부하고 토론도 했는데, 한 번은 병역거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혁명의 순간에는 폭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와 병역거부를 선언한 우리가 충돌했다. 총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자니 오지도 않을 혁명이 걱정되었고, 혁명을 위해 총을 들겠다고 말하자니 병역거부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모두 갈팡질팡했다. 

지금이야 우문에 현답을 할 수 있지만 당시 나는 정말 평화주의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병역거부 소견서에도 썼다시피 나는 평화주의자라서 병역거부를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병역거부자가 되고 나서 평화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니 말이다. 


사실 언제 어떻게 올지도 모르는 혁명의 순간을 고민하는 건 어쩌면 덜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나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은 이런 거였다. "그렇다면 너의 양심은 80년 광줴서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계엄군과 싸우던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하는데?" 이건 병역거부자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 나를 당혹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당시 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의 모습이 견결한 신념을 가진 투사의 모습처럼 느껴졌다기보다는 끝내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부응한 사람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죽음이 혁명운동의 씨앗이 되어 훗날 피어오를 거라는 믿음을 가진 분들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도청에 남았던 분들이 많지 않았을까?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감히 말하자면 나는 그분들의 행동이 병역거부자들의 병역거부와 유사점이 있다고 느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런데 행동의 양상은 정반대였다. 도청에 남은 분들은 총을 들었고, 병역거부자들은 총을 거부했다. 이 대비가 나를 당혹하게 했다. 병역거부자와 오월 광주는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걸까? 그렇다면 병역거부자인 나는 오월 광주, 특히나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킨 분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지?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나는 소설 속에서 찾았다. 맨부커상 수상했다고 떠들썩한 소설가 한강이 쓴 오월 광주에 대한 소설 <소년이 온다>가 바로 그 소설이다. 꽤나 몰입해서 읽었고, 가슴에 깊게 남는 구절도 여러 군데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 내게 가장 인상깊은 구절은 도청의 마지막 밤을 묘사한 구절이었다. 


  아니요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117)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병역거부와 오월 광주가, 도청에 끝까지 남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불현듯 깨달았다. 아니 내가 깨달은 게 아니다. 소설이 보여준 것을 나는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정말로 그랬는지, 소설가 한강이 들은 이야기인지, 아니면 창작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 도청에 남은 이들. 아마도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는 걸 예감했을 것이다. 저 눈앞의 계엄군을 쏘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박노자는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에서, 2차 대전 당시 군인들의 조준 사격율이 15%로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죽이는 일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당시 도청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소설처럼 손에 쥔 총을 쏘지 않았거나, 하늘을 향해 총을 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만 같다. 


만약 내가 오월 광주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면, 그러면서 병역거부자였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내가 과연 오월 광주에 살았다면, 도청에 끝까지 남을 수 있을지. 지금 생각으로는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도청에 남지는 못했을 거 같다. 그렇더라도 오랫동안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던 이 질문에 이제는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도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을 거라고. 총을 들고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총을 쏘지 않으면서 계엄군과 싸웠을 거라고. 그들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을 거라고. 












<직접행동> 에이프릴 카터, 교양인

옮긴이 서문

이렇게 극히 작고 극히 큰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극단적인 불평등 사회에서 주권재민, 보통선거, 법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원칙만으로 참된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키가 몇 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땅강아지 같은 사람들과 남산보다 더 큰 거인들 사이에 물리적으로나 은유적으로나 참된 의사소통과 민주적 토의가 가능할까? 또한 거인들이 민주주의 과정의 배후에서 정치인들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미디어, 선전매체,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작은 사람들의 의식을 교묘하게 조작하며, 각종 제도를 통해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철통같이 고수할 때에 투표 행위라는 '민주적' 절차가 민주주의를 과연 얼마나 제대로 보장해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이런 거인들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아무 제약 없이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초국적 자본의 이동) 가는 곳마다 영향력을 발휘하고 작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다면 그것을 과연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소득불평등이라는 렌즈로만 민주주의의 허점을 짚어보았지만 이런 허점은 여러 영역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민주주의의 결손을 넘어 민주주의를 '재발명'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 할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여기에는 세 가지 고려가 있을 수 있다 .

(아래부터는 임의로 축약)

첫째, 시민권의 문제. 시민권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더욱 참여적이고 적극적인 시민을 어떻게 육성할 수 있을까? 방대한 현대 국가에서 실시하는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진정한 시민권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거대한 불평등 현실은 단일한 보편 시민권 개념이 감당할 수 있는가? 누구를 배제하고 누구를 포용할 것인가?


둘째, 민주적 응집성의 문제. 이것은 정치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에서 단순히 '다수의 지배'라는 원리에 밀려 배제된 사람들의 정치적 응집성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초국적 자본 이동의 시대를 맞아 민주주의를 정부의 영역보다 민간 부문에서, 국내보다 국제적으로, 정치 영역보다 비정치 영역에서 더욱 과감하게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셋째, 민주주의의 장소와 정치적 주체 행위의 문제. 복잡한 21세기의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어디인가? 만일 국민국가가 더는 민주주의에 가장 적합한 '유일한' 장소가 아니라면 그것은 전 지구적 차원의 어떤 기구인가, 아니면 분권화된 지역사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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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른바 민주정치의 선진국들도 엄청난 정치적 파란과 투쟁을 거쳐 민주주의를 쌓아 올렸음을, 그리고 정태적인 절차 민주주의의 완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절차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화석화된 민주주의로 전락한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하겠다. 


-------------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의 '완성'을 이야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1987년 6월 이후 민주화운동이 종결되었고 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렸다는 식의 단절적 사고는 민주주의를 극히 형식적으로, 근시안적으로 이해하는 착각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많고 적고의 문제이며, 존 듀이의 말처럼 민주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행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확장하기 위한 끊임없는 민주화운동이 필요할 뿐이다. 직접행동 민주주의는 지구화시대에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내고, 더 많고 더 강하고 더 좋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이자, 수많은-과반수가 훨씬 넘는-작은 사람등에게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민주적 '안전장치'인 것이다. 이 책의 의의는 바로 이 점을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엄밀한 정치이론으로써 성공적으로 논증한 데에 있다. 



33쪽

직접행동은 민주적 자력화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실제로 직접행동은 저항을 계획하고 그러한 저항의 일부 요소인 대안 제도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그런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독특한 민주주의 사상과 실천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될 때 직접행동은 일종의 직접민주주의를 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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