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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에 해당하는 글(2)
2013.02.13   노동자들이 불행을 경쟁해야 하는 나라
2013.02.04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나를 지켜주는 기업이 필요해요


노동자들이 불행을 경쟁해야 하는 나라

작년 말, 출판사 노동조합들이 「출판 노동자 가이드북」출간 기념으로 출판노동자를 위한 노동법 강연을 열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강연을 들으러 왔는데, 하나같이 강연에 집중하고 질문도 활발히 했다. 다들 회사에서 직간접으로 겪은 일들로 노동자들의 권리가 법에는 어떻게 나와 있나 궁금했던 거 같았다. 그날 나온 질문들은, 듣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밀린 임금을 받으려고 팀원들이 회사 압박 차원에서 단체로 사표를 냈는데, 밀린 임금은 받았지만 사표를 돌려주지 않아 혹시 회사 그만두게 되는 건가 걱정하는 노동자의 걱정스런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강연 열기는 뒷풀이로 이어졌다. 예약한 술집이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강연 자리에서는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쏟아냈다. 어느 회사에서는 이런 일이 있다더라, 어느 사장님은 저런 짓을 한다더라 같은 이야기들이 흘러넘쳤다. 그러다 어느 두 출판사 노동자들끼리 배틀이 붙었다. 서로 자기 회사 사장이 더 나쁘다면서 한 쪽에서 하나의 사례를 말하면 다른 쪽에서 다른 사례로 붙었다. 결국 한 쪽이 자기 회사 사장의 조금 엽기적인 기행을 이야기하면서 정리가 됐다.

한참을 웃고 떠들었는데 뒷맛이 씁쓸했다. 우리는 불행을 경쟁하고 있었던 거다. 누가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지, 누가 더 회사 내에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 누구 회사가 더 나쁜 회사인지……. 약간은 과장도 섞이고 재미있게 이야기 하느라 허풍도 끼어들었겠지만, 우리가 처한 노동현실이 누구 회사가 더 좋은지가 아니라 누구 회사가 더 나쁜지를 이야기해야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이 서글펐다.

  
▲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 표지.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에 나온 노동자들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같은 이유로 서글퍼졌다. ‘징계, 해고, 직업병, 임금체불, 장시간 노동’ 같은 단어들은 빠지지 않는 단골 손님이었고, 가끔씩 ‘커터칼, 사찰’ 같은 끔찍한 단어들도 튀어나왔다. 노동 현장에 대한 르포가 아니라 하드코어 엽기물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 무시무시했다. 노동운동 하지마라고 커터칼을 목에 들이밀고(‘반복되는 현실’ 한국타이어 해고노동자 정승기), 재벌이 접수했어도 그래도 명색이 대학인데 학생을 사찰하고(‘악의 탄행’ 중앙대학교 4학년 노영수), 노조를 깨기 위해 노조 파괴 전문 회사의 도움을 받는 것도 모자라 군대에서나 쓰는 장비를 가진 용역업체를 불러들인다(‘치유와 회복의 시간’ SJM 생산기술부 노동자 김신태). 이 사람들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바로 잡자고 한 것뿐인데 말이다.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들을 때마다 화나고 분노하게 되는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다가 갑자기 온 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고 몸에 냉기가 돌았다. ‘여기 나와 있는 이야기들, 그렇게 낯선 게 아니잖아? 내가, 내 동료들이, 내 친구들과 내 가족이 겪은 일들이랑 크게 다를 게 없잖아’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랬다. 커터칼 위협 같은 아주 극단적인 이야기 빼고는 조금씩 모양을 달리해서 내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었다. 

직무정지 당하고 컴퓨터도 없는 빈 책상에서 파티션만 바라봐야 했던 삼성 노동자 박종태 씨처럼(‘환상’ 전 삼성전자 VD사업부 노동자 박종태), 내 동료도 대기발령을 당하고 컴퓨터마저 빼앗기고 회사 책만 읽고 독후감을 써내야 했다. 그 동료는 대표이사의 업무지시가 부당하다 생각해 업무지시에 따르지 않고 그 까닭을 편지로 써서 대표이사한테 보냈을 뿐이었다. SJM에서 출퇴근 시간 체크기를 도입해 근태나 사소한 것들로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걸 보면서, 회사가 출퇴근 시간 체크기 도입하면서 노동자들을 괴롭힌다고 힘들어 하던 내 친구가 떠올랐다. “노동자들이 경영에 관여하게 해달라고 하면 경영은 고유 권한이라고 탄압하고, 막상 문제가 터지니까 잘못을 우리한테 떠넘기는 거죠. 우리가 뭘 잘못했나요?”라는 문기주 씨 외침은(‘인간의 끝’ 전 쌍용자동차 양산정비사업소 노동자 문기주) 내가 늘 하고 다니는 말과 너무나 똑같았고, “너희들은 좋은 조건에서 일하면서 뭐 그러냐?”는 질문에, 할 말 못하고 힘든 거 티도 못 내는 김성오 씨는(‘또 다른 사회적 편견’금융계 공기업 A회사 근무하는 김성오) 남들보다 복지나 처우가 좋지만 그걸 뛰어넘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내 동료들 처지와 똑같았다.


  
▲ 통합진보당 이상규 의원은 지난 2012년 11월 26일 오후 쌍용차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경기도 평택의 한 송전탑을 방문, 기자회견 후 농성 1주일을 넘어선 한상균, 문기주, 복기성 씨에게 방한용품 전달과 건강 및 안전 상태 확인을 위해 직접 송전탑에 올랐다. 농성중인 세 사람이 이 의원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통합진보당 제공)ⓒ뉴스1

회사들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아주 처절하게 파괴했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고, 비참하게 만든다. 차라리 임금체불하거나, 부당해고라도 깔끔하게 해고하는 회사가 인간적이고 느낄 만큼 사람 마음을 파괴한다. 투명인간 취급을 하거나(박종태), 인원 감축을 하는데 동료직원들끼리 사랑의 작대기처럼 서로를 지목해서 감축을 한다(김성오). 이 모멸감을, 인간으로써 수치심을 어떻게 견딜 수 있나. 노동자가 잃는 것은 돈벌이, 직장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당장의 생계도 위협받지만, 동시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의 힘까지도 잃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폭력은 맞은 부위가 나으면 끝나지만, 사람 마음은 한 번 파괴되면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 용역들의 폭력에 당한 노동자들이 계속 힘들어 하는 것도 용역들한테 맞은 몸뚱아리 때문이 아니라 엄청난 폭력에 노출되며 마음이 무너졌기 때문일 거다.

폭력에 노출된 노동자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심리적, 신체적 이상을 겪기도 하고 이직이나 퇴사를 고민하게 된다(402쪽~404쪽, 우울증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노동자 87.8%, 정신적인 폭력으로 퇴사나 이직을 고민한 적이 있는 노동자 82.8%). 가장 슬픈 일은 정신적인 폭력이 심해질수록 직장 내 왕따 문제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회사 구조나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상대적으로 약한 동료들에게 푸는 거다.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다른 피해자를 낳는 구조는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대하는 방식이 ‘폭력’이 아니라 ‘대화’였다면, 아니 대화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설득’만이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했다. 노동자들의 경영참여, 노사 간의 동등한 대화 이런 건 언감생심 꿈도 안 꾸고, 그저 노동자들이 납득할 수 있게 설득이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한국타이어 공장에서 한 달에 5명이 죽어가는 일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20명 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이 50명 넘게 직업병으로 죽어가는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파국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 삼성 백혈병·직업병 피해자 증언대회가 열린 지난 2012년 7월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신관 제1세미나실에서 고 황민웅씨의 유가족이 발언하고 있다. 이번 대회를 개최한 통합진보당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삼성 백혈병·직업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지금까지 56명에 달한다고 밝혔다.ⓒ뉴스1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설득’마저도 자리가 없다. 이 책에 나온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나도, 내 친구들도 회사의 업무지시와 따르지 않으면 경위서를 써야한다는 명령만 들었지, 왜 그리 해야하는지 설득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보면서 한동안 열패감과 절망감에 빠져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 엄청난 문제들, 해고, 비정규직 차별,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 하청에 하청에 하청에 하청을 주는 구조, 싸이코 패스 기업 문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꼬인 매듭을 풀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노동조합을 만들면 되나? 확실히 노동조합이 있으면 없는 회사들보다는 좋은 게 많다. 하지만 한국타이어 정승기 씨 사례처럼 어용노조들도 많고, 임미수 씨 사례처럼(‘기업의 이면’ 컴퓨터 프로그래머 임미수) 노조 만드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어렵고 회사의 파괴공작에 어처구니없이 노조가 해체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헌법에서 노동조합의 쟁의권이 보장되는데, 파업만 하면 불법이라고 딱지 붙이고, 합법 파업을 하면 손해배상 하라며 수십 수백 억을 들이미는데, 노동조합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열패감에서 나를 건져 준 건, 전혀 다른 기업이 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증거였다.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노동자 대표가 이사진에 참여하는 스카니아 공장이나(‘스웨덴 스카니아 공장 르포’ 한겨레 정혁준 기자), 해고나 비정규직 같은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회적 기업 심원테크(‘기업이 주는 감동’ 심원테크 사회적 기업 이사 김준호) 같은 곳들 이야기를 보면서 기뻤다. 물론 한두 기업이 그리 한다고 전체 구조가 바뀌는 건 아니겠지만, 기업이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이 폭력이 아닐 수 있다는 소중한 증거가 되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업들이, 노동자와 공존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 하는 기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들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좋은 기업 보고서’가 나오는 날도 있겠지.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나쁜 기업들의 실체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은이 김순천 씨가 ‘들어가는 말’ 끝에 이야기 한 이 책의 역할에 깊게 공감한다.

한국타이어의 정승기 씨 말대로 기업 안에서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자유롭게 내뱉을 수 있게만 해줘도 이렇게 열악한 환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직장인들이 기업에서 겪은 다양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그마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820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나를 지켜주는 기업이 필요해요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나를 지켜주는 기업이 필요해요>

김순천, 오월의봄, 2013


들어가는 글

한국타이어 정승기 씨 말대로 기업 안에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자유롭게 내뱉을 수 있게마 해줘도 이렇게 열악한 환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직장인들이 기업 안에서 겪은 다양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마할 수 있는 자그마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92쪽

기주 씨는 쌍용차 문제가 터졌을 때 경제적인 문제인 줄만 알고 수습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했다. 상여금을 반납하고, 근무시간을 다섯 시간으로 줄여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비정규직 임금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다. 머리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생각까지 다 짜내어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93쪽

노동자들이 경영에 관여하도록 보장을 해달라고 하면 경영은 자본의 고유한 권한인데 너희들이  왜 그걸 달라고 하냐면서 탄압을 하고, 이제 막상 문제가 터지니까 경영의 잘못을 우리한테 다 떠넘긴다는 거죠. 우리가 뭘 잘못했나요? 우리는 일만 열심히 한 죄밖에 없잖아요. 회사가 어려운지, 안 어려운지 경영자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준 적이 있냐고요. 재무제표 한 번 보여준 적도 없으면서 투명하게 공개해달라고 하면 그것은 너희들이 알 바 아니라면서 딱 끊어버리고는, 이제는 경영이 어렵다면서 다 나가라고 그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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