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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먹고 체한 이야기'에 해당하는 글(1)
2015.10.11   청국장만 빼고


청국장만 빼고

두부, 콩장, 콩밥, 콩비지, 콩국수, 두유... 콩으로 만든 음식은 뭐든 좋아한다. 심지어 송편을 먹을 때도 깨설탕이 든 송편보다 콩이 들어있는 송편을 좋아한다. 감옥 가면 콩밥 먹는다고들 하는데, 병역거부로 수감되었을 때 콩밥이 아닌 보리밥이 나와서 '아 이제 다시는 감옥 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 하나, 정말 이 하나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청국장이다. 이상하게 청국장은 맛있지 않았다. 냄새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나는 홍어를 비롯한 강한 냄새로 유명한 음식들을 곧잘 먹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청국장은 맛이 없었다. 밖에서 사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청국장도 별로였다. 굳이 찾지는 않지만 있으면 먹는 정도도 아니었다. 식탁 위에 청국장이 있어도 나는 손도 안 댔다. 


그러다가 청국장을 먹게 된 계기가 있다. 입맛이 바뀌어서 먹은 건 아니고,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억지로 먹었다. 평소 견과류나 콩으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라 고기를 끊은 뒤에도 단백질 섭취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옥에서는 달랐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딱히 단백질를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 없었다. 나는 반찬으로 나오는 콩들을 일부러 더 많이 먹기 시작했다. 콩장이나 두부야 원래 좋아하는 음식이니 많이 먹는 게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 처음 청국장을 먹기 시작했다. 맛은 없었지만, 건강하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먹었다. 청국장 중에서도 덜으깨진 콩과 두부를 집중적으로 먹었다. 

먹다보니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애써 찾아서 먹지는 않을 거 같았지만, 밥상 위에 올라온 고단백 음식을 마다할 정도로 먹기 싫은 맛은 아니었다. 특히 청주교도소의 청국장이 맛있었다. 두부도 듬뿍 들어가 있어서 나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청국장이 나오는 날이면 정말 보리밥 반, 청국장 콩 반 이렇게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청국장을 먹고 나서 크게 탈이 났다. 출소하기 한 달 전이었으니 계절은 딱 이맘때였을 거다. 추석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고 그랬으니. 어느날 저녁에 청국장이 반찬으로 나왔다. 때마침 비가 오는 날이고 바람은 완연하게 가을로 접어들어 제법 쌀쌀한 날씨여서 따뜻한 국물이 땡길 때였다. 방도 몸도 서늘한데, 청국장 국물은 뜨끈했다. 배도 고프고 왠일로 청국장도 제법 맛있어서 조금 과식을 한다 싶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나는 감옥에서 굉장히 소식을 하면서 밥 양을 줄였는데(지금 먹는 양의 반도 안 먹었다), 가뜩이나 줄어든 위로 과식을 했으니 탈이 나는 건 당연했다. 막 토악질을 할 정도로 많이 먹은 건 아니었으니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밤이 깊어갈수록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되었다. 부글부글하던 배는 진정이 되어 가는데, 이상하게 치통이 오기 시작했다. 몸이 느끼는 통증 가운데 치통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 심장이 뛰는 박동에 맞춰 치통 부위가 시큰거리고, 걸음을 걸을 때마나 같은 부위가 아파왔다. 뇌 가까운 곳의 통증이라 그런지 갈수록 두통까지 동반했다. 그러더니 마치 감기 몸살에 걸린 듯 온 몸이 세게 후려 맞은 것처럼 아프고 힘이 없었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사동 주임에게 말해 감기약을 받아 먹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걸을 때마다 골이 울리니 걸어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그때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이 죄다 여호와의 증인이거나 탈영병 출신들이었는데, 그들은 평소에도 내가 나이가 많다고 나에게 깎듯하게 대해줬다. 평소에는 그런 태도가 그다지 좋게 보이진 않았는데,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니 그들이 나를 대하는 그 태도가 정말이 너무나 고마운 게 아닌가. 제대로 걸어다니지도 못하고, 편지 쓰기는커녕 책과 신문도 못 보고, 오는 편지는 한 번 훑어보고 답장도 다 미뤘다. 감옥에서 아프면 참으로 서럽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앓고나니 감기몸살은 늦여름 더위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는 보름 뒤쯤 가석방으로 출소하게 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은 더러 출소를 앞둔 직전이나 출소한 직후에 별다른 이유 없이 크게 앓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의 긴장이 풀려서 그러는 거 일테다. 내가 아팠던 것도 아마도 출소를 앞둔 시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나는 가석방 출소를 나오지 못할 뻔 했는데, 밖으로는 최대한 표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가 가석방으로 나오게 되니 긴장이 풀리는 폭이 더욱 컸을 것이다. 결코 과식한 청국장 때문에 일주일이나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아팠던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어디 인간이 논리와 이성만으로 인과관계를 정리하는 사람이던가. 내 머리는 출소병을 앓았을 뿐이라고 결론 내렸지만, 내 몸은 그 뒤로 청국장을 아주 강하게 거부했다. 이번에는 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청국장을 먹으면 또 다시 체하고 그때처럼 아플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벌써 아주 예전의 일이다. 몇 년 전 일인지 생각하려면 올해 년도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계산해야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은 청국장을 먹더라도 체할 거 같고, 아플 거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청국장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다. 식당에 갔을 때 기본 반찬으로 나오면 몇 숟갈 먹을 정도지만, 내 돈 내고 사 먹는 음식은 아니다. 청국장만 빼고, 콩으로 만든 음식은 여전히 다 좋다. 


지난 주 목요일에 두부집에 갔다가 밑반찬으로 나온 청국장을 한 숟가락 떠먹었더니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오른 김에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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