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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때인지 3학년때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광주 광천동 터미널 근처 화정동에 살고 있을 때다. 당시 또래 아이들은 하나둘 씩 가정용 게임기를 장만했다. 패미콤이 가장 일반적이었고, 메가드라이브도 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좀 더 마이너한 게임기 이름들은 기억이 안 난다. 당연히 나도 무척 갖고 싶었다. 내 기억으론 부모님께 뭐 사달라고 떼쓰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아무튼 떼를 썼는지 그냥 말은 못하고 티만 팍팍 냈는지 기억은 나질 않는다. 아빠가 어느날 게임기를 사가지고 왔다는 것밖에는. 우리집 게임기는 슈퍼콤이었다. 아마 광주 전라 지역 출신이 아니라면 생소한 이름일 거다. 해태전자(해태에서 껌만 만든 게 아니다!)에서 만든 가정용 게임기인데, 실상은 패미콤을 베낀 거였다. 아빠는 게임기와 함께 게임 팩 하나를 사가지고 오셨다. 그 게임 팩에는 4가지 게임이 들어있었다. 핀볼, 야구게임, 빙벽등반, 로드파이터(자동차 게임). 4개를 다 합쳐도 용량이 몇 백 kb에 지나지 않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당시에는 1메가를 넘는 게임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주 단순한 게임이지만 무척이나 재밌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좀 지겨워졌는지, 아니면 닌자거북이 게임을 하는 같은 반 친구가 부러웠든지 때마침 일본으로 출장을 가는 아빠한테 닌자거북이 게임팩을 사다달라고 했다. 당시에는 정말 남자아이들에게 닌자거북이가 후레쉬맨 다음으로 인기가 많았다. 아빠는 일본에서 돌아오며 게임팩 하나를 안겨줬다. 기대헀던 닌자거북이가 아니었다. 아빠는 이 게임이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이라고 했지만 나는 닌자거북이가 아니라서 조금 실망했다. 그 게임은 슈퍼마리오3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닌자거북이가 아니라 슈퍼마리오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게임에 별 소질이 없던나는 슈퍼마리오를 정말 질리도록 했지만, 엔딩을 보지 못했다. 피리 아이템을 쓰면 몇 단계를 점프해서 끝판 까지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템을 쓰지 않고 정석대로 플레이해서는 2단계인 사막, 3단계인 물속까지밖에 못갔다. 게임 잡지의 게임 묘수를 열심히 찾아가며 숨겨진 아이템을 다 모아도 실력이 안 됐다. 5학년 때인가는 이번에는 엄마한테 게임팩을 사달라고 했는지 아무튼 엄마랑 동생이랑 나랑 시내에 나갔다. 당시 광주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화니 백화점에 갔거나 가든 백화점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광주 시내는 대학생들의 데모에 경찰이 쏜 최루탄으로 난장판이었다. 그날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루탄을 맡았던 날이다. 어땠는지는 별 기억이 안나는 것으로 봐서 별로 고생스럽지는 않았던 거 같다. 금남로였는지, 충장로였는지 아무튼 복잡한 길을 뚫고 백화점에 갔다. 그때 당시 가장 인기 있던 게임은 드래곤볼Z2였다. 베지터와 싸운 게 드래곤볼Z1, 프리저와 싸운 게 Z2였다. 너무 비싸면 사지 않기로 엄마와 약속을 하고 갔다. 그런데 백화점에서 드래곤볼Z2의 가격을 보곤 나는 실망을 금치않을 수 없었다. 4만5천원인가 5만원인가 그랬다. 지금도 게임 하나에 5만원이면 엄청 비싼 게임인데 당시가 90년대 초반이니, 5만원은 당시 초등학생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당시 내 경제 관념은 학교앞에서 파는 가래떡 떡볶이 하나에 150원 수준이었다. 집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는데, 엄마는 정말 큰맘을 먹고 드래곤볼Z2를 사주셨을 거다. 그 게임을 정말 질리지도 않고 했다. 순발력이 필요한 슈퍼마리오와는 다르게 드래곤볼은 급할 게 없는 게임이었다. 이 게임은 엔딩을 수십 번도 더 봤다. 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을까? 아까 라디오에서 산울림의 '청춘'이 흘러나와서 그런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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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래들은 세월과 상관없이 사랑받는다. 하지만 많은 노래들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멜로디가 촌스러워서 잊히기도 하고, 유행하는 장르가 달라지면서 사람들에게 잊히기도 한다. 멜로디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진 세상과 노랫말이 맞지 않아서 점점 잊혀지는 노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윤종신의 보컬 데뷔곡인 '텅빈 거리에서'의 가사는 그 노래가 발표된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노래 가사에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난 수화기를 들어 너를 사랑해 눈물을 흘리며 말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야윈 두 손엔 외로운 동전 두 개 뿐"이란 노랫말은 공중전화를 써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노랫말이 품고 있는 감정의 결이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혹시나 다른 가족이 전화를 받으면 어쩌나 마음 졸이며 전화를 걸 떄의 그 불안감과 묘한 기대감은 분명 개개인에게 직접 연결되는 핸드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서다.
'텅빈 거리에서'가 외로운 동전 두 개로 전화를 걸던 시절의 정서를 표현했다면, 꽃다지의 '전화카드 한 장'은 동전에서 전화카드로 대세가 넘어간, 그렇지만 아직 핸드폰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던 시절의 정서를 표현한 노래다. 내가 대학을 입학한 99년도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전국민이 핸드폰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우리 과 정원이 한 학년에 30명이었는데,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핸드폰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한 학년에 10명이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99년 내내 아침에 학교에 가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 핸드폰을 장만한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번호를 알려주며 핸드폰을 자랑하곤 했다. 나는 핸드폰을 갖고는 싶었지만, IMF로 아버지가 실직한 마당에 비싼 핸드폰을 사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랬는데, 2학기 때 가을 농활을 갔다와보니 아버지가 선물이라며 LG 싸이언 핸드폰을 주셨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과에서 내가 늦은 편이긴 했지만 내 뒤로 장만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던 것이 00학번이 입학할 때는 신입생들도 핸드폰이 없는 친구가 없었다 1년 만에 완벽하게 보급된 것이다. 핸드폰이 보급되는 속도만큼 빠르게 자취를 감춘 노래가 바로 '전화카드 한 장'이다. 나는 행진곡풍의 투쟁곡보다는 멜로디나 가사가 서정적인 노래를 좋아했는데, '전화카드 한 장'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과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 노랫말이 참 좋아서, 힘들어 하는 친구에게 힘들 때면 내게 전화를 하라고 전화카드 사주기도 많이 했다. 그 당시엔 그게 유행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도 전화카드를 받은 적이 있다.
1999년 5월 15일. 지금이야 5월 15일은 병역거부자의 날로 기억하지만(나와 내 주변만ㅋㅋ)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맞는 스승의날이라고 나는 친구들과 내가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비가 조금씩 흩날리는 날이어서 우산을 쓰고 갔다. 그러고나서 나는 용산역으로 향했다. 당시 용산역은 지금처럼 삐까번쩍하지는 않았고 역 앞에 광장이 있었는데, 그 광정에서 민중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 학교 깃발을 찾아가보니 당시 부총학생회장인 기석이형, 그리고 총학생회 집행국인 진숙누나, 준식이형, 병국이형이 있었다. 아마 백윤이형도 있었을 거고 과 동기 윤정이도 있었던 거 같다. 집회를 한참 하고 있는데 동수형이 갑자기 나타났다. 동수형은 놀러 갔다가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집회하는 것을 보고 온 거였다. 평소같은면 1호선 노량진 역에서 내려서 마을버스를 탔을 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냥 용산역에 내리고 싶었다고 한다. 내려보니 집회를 하고 있고 우리 학교 깃발을 보고 온 것이다. 집회가 끝나고 시내쪽으로 행진을 했다. 남학생들은 사수대로 나오라고 해서 나와 동수형이 사수대에 나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나는 겁이 참 많아서 사수대 나가는 일이 늘 두려웠고, 사수대에 나가서는 집회가 충돌없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사수대라고 해봤자 성별만 남성일 뿐 나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잔뜩 들어와 있는데다가 그냥 맨손이어서 뭘 사수하려해도 사수할 도리가 없으니 더욱 겁이 났다. 우리 앞에 서 있는 전투경찰의 열이 갑자기 가운데가 갈리면서 조금 다른 복장을 한 전투경찰들이 우리 앞으로 나섰다. 겁먹은 내 표정을 봤는지 동수형은 걱정안해도 된다고 했다. 이렇게 스크럼을 짜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면, 시민들이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경찰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했다. 동수형은 평소 우리 과 최고의 사기꾼 뻥쟁이지만 그때 만큼은 동수형의 말이 물에 빠진 내게 지푸라기가 아니라 튼튼한 항공모함처럼 느껴졌고 벌벌 떨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동수형은 내게 뻥을 치지는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틀린 말을 한 거였다. 경찰이 갑자기 달려들어 사수대를 때리고 잡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혼비백산해서 경찰을 등지고 무턱대고 마구 도망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내 옆 사람들이 경찰에게 잡혀가고 나도 바로 뒤까지 쫓아온 경찰에게 곤봉으로 등짝을 한 대 맞았다. 본대오와 사수대는 순식간에 뒤섞였고, 급하게 달리다보니 여기저기서 넘어지는 사람이 생겼다. 그러던 와중에 내 바로 앞에서도 여학생 한 명이 넘어졌다. 워낙 속도를 내서 달리고 있었기 떄문에 나는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다. 피하려고 몸을 움직였다간 나 또한 그 여학생에 걸려 넘어질 판이었고, 내 등짝을 후려갈긴 경찰은 여전히 바로 뒤에서 나를 쫓아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두눈을 질끈 감고 그 여학생을 밟고 지나갔다. 그 여학생이 경찰에게 잡혔는지, 잡히기 전에 맞았는지, 혹은 내 뒤에 오늘 다른 시위대가 넘어지며 그 여학생 위로 사람들이 탑처럼 쌓이게 됐는지 도무지 확인할 여력도 없이 냅다 뛰기만 했다. 어느 정도 뛰었는지 가늠도 안 되었다. 2선에 있던 사람들이 보도블럭을 꺠서 경찰과 투석전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경찰들도 돌멩이가 날라오자 더 이상 심하게 쫓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저마다 함께 온 일행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동수형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본대오에 있는 우리 학교 깃발로 돌아가봣지만 동수형만 없었다. 무사하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잡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집회가 끝나는 동안까지 동수형은 연락이 없었다.
우리는 정리집회가 끝나고 나서 학교 앞으로 돌아와 황토방이라는 술집에서 뒷풀이를 했다. 잡혀간 동수형 생각이 나고, 혼자 도망친 거 같아 미안한 마음에 술을 달게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둥 마는둥 하고 있는데 동수형과 연락이 닿았다. 까치산 역에 있다는 거다. 분명 용산역에서 집회를 했고 행진하다가 시청 근처에서 흩어졌는데 까치산이라니? 나중에 들어보니 동수형은 당시 경찰들한테 잡혔고, 경찰들에게 길바닥에서 마구 맞았다고 한다. 경찰이 방패로 찍어서 머리가 찢어져 피가 났다고 했다. 실컷 팬 뒤 경찰 한 명이 동수형을 연행해가는데, 역시 우리 과 최고의 구라꾼 답게 머리가 피흐르는 것을 이용해서 현기증이 나서 갑자기 쓰러지는 것처럼 연기를 했다고 한다. 경찰도 놀랐는지 손을 잠깐 놨는데 그 틈을 타서 잽싸게 뛰었고, 경찰이 쫓아오지 못하게 차도를 건너서 아무 버스나 오는 걸 붙잡아 타고 가다가 까치산에 내렸다 했다. 머리를 다쳤다니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잡혀가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그때부터 모두들 즐겁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자 술판은 어느덧 노래판으로 바뀌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고, 시작은 혼자서 하되 결국에는 모든 노래를 다같이 합창을 했다. 그때 내 옆에 총학생회장 영수형이 앉아있었는데, 자기 차례에 부른 노래가 바로 '전화카드 한 장'이었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지갑에서 전화카드를 꺼내더니 전화카드를 내 손에 쥐어주면서 내 손바닥에 자기 핸드폰 번호를 적어줬다. 세상에, 총학생회장이 힘들 때 자기한테 전화하라고 전화카드를 주다니! 당시만 해도 순진하기만 했던 나는 정말이지 감격스러웠다. 뭔가 대단한 것을 인정받은 것만 같았고, 총학생회장과 각별한 사이인 유일한 새내기라도 된 것처럼 설레였다.
바로 다음 날, 학교 앞 공중전화에서 그 전화카드로 총학생회장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카드 한 장' 가사처럼 힘들고 지쳤던 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밥을 사달라거나 술을 사달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사달라고 안 해도 사줄수도 있겠다는 계산 정도는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냥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 전화카드로.
그런데...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길 바랍니다." 수화기 너머로 기계음만 들릴 뿐이었다. 나는 설마, 내가 번호를 잘못 눌렀겠지, 생각하며 몇 번이고 다시 걸어봤지만, 총학생회장은 받지를 않고 한치의 오차도 없는 기계음의 여자 목소리만 반복해서 들렸다.
하긴, 술취한 사람이 전화번호를 잘못 쓸 수도 있지... 덕분에 전화카드 하나 공짜로 얻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전화카드에 대한 노래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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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작은 집단의 독재자를 내쫓지 못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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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보니 농활이란 게 있더라. 난 주변에 대학생이 한 명도 없어서 농활이 뭔지 몰랐다. 다만 대부분의 집회에 참여하는 성실한 학생운동 새내기였기 때문에 농활동 당연하게 참여했다. 우리 과는 옥천 안내면인지 안남면인지에 위치한 방하목이라는 굉장히 외진 마을이었다. 농민분들의 환대도 좋았고, 막걸리에 취해 농사일 하는 것도 재밌었고, 힘든 노동 중간 중간 먹는 새참과 일 끝나고 먹는 밥맛이 너무나 꿀맛이어서 대학 내내 농활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게 됐다. 2학년때부터는 마을을 옮기게 되었다. 충북 농민회 안에서 알력다툼 때문이라고 얼핏 들었던 거 같다. 아무튼 우리학교에서 가장 많은 농활대를 자랑한 문과대는 옥천을 떠나 충주로 가게 되었다. 새로 들어간 마을은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좀 어려웠다. 농민분들은 착하셨지만, 이상하리만치 술을 멀리 했다. 일하는 중간에도 그렇고 일이 끝나고도 우리와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일 끝나고 밤에 우리끼리 술을 마셨지만 흥이 나질 않았다. 사실 그 마을에선 예전에 농활을 하다가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다. 어느 농민이 여학생을 성추행했다고 들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그 마을 농민회 사람이었고, 그 사람을 제외 시키고 농활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으로 농활대를 다시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들어가기 꺼려하던 그 마을엔 당시 문과대에서 에이스(라고 우리만 생각했었나?)였던 우리 과가 들어가게 된 거였다. 낮에 일을 하면서도 농민분들에게 얼핏설핏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예전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 성격이 괄괄해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못막는다는 것, 하지만 이제 결혼을 했으니 예전 같은 그런 일은 안 할 거라는 이야기도. 그렇게 며칠을 우리끼리 지내던 어느 밤, 마을 농민회장님이 찾아왔다. 농민회장님을 중심으로 삥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농민회장님은 우리에게 새로온 마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뭐 그런 이야기를 물어보고 우리도 성심성의껏 대답하며 시간을 보냈다. 확실히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야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처음 보는 농민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첫눈에 보기에도 강한 인상, 그리고 그 농민을 보자 표정이 찌그러지는 농민회장을 보면서 이 사람이 바로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라는 걸 우리 모두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우리가 긴장한 걸 봤는지 농민회장님이 나서서, 여긴 왜 왔냐고 돌아가라고 말을 했지만 말에는 힘이 없었다. 그 남자는 뭐라 한마디 내뱉고는 농민 회장님에게 발길질을 한 번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농민회장님은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그 남자가 그러고 나서 그 자리에 머물면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니면 그냥 돌아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마을을 옮겼다. 그게 2000년이었으니까 벌써 15년 전 일이다.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나지 않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풍기는 그 기운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기운은, 꼼작하지 못하고 그저 얻어맞기만했던 농민회장님의 표정과 대비되어 그 마을의 권력자가 누구인지 여실히 보여줬다. 그 남자가 풍긴 기운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 혹은 <이끼>의 이장 같은 작은 사회의 절대권력자가 내뿜는 기운이었다. 우리가 옮긴 마을은 정반대였다. 그 마을의 농민회장님은 그 면의 농민회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우리는 새로운 마을의 친절하고 술 좋아하는 농민들 덕에 금새 적응하게 되었다. 새로운 마을의 농민회장님은 우리가 도망치듯 나온 마을 상황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무척 답답해했다. "아니, 사람들이 합심하면 될 것을, 그 한 사람을, 그걸 왜 못 이겨."라고 하셨다. 그뒤로도 여러 집단에 속해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체로 자그마한 집단이었다. 독재자들도 여럿 만나봤다. 물론 그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 밖에서는 대체로 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경우가 많았고, 자기 집단 안에서는 독재를 하더라도 집단 밖에서는 권력에 맞서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런 독재자들은 대체로 그 집단의 돈줄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권력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절하게 저항하거나 싸우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굳이 거부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싸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저항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천국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저항하다 만신창이가 되어 쫓겨나거나 떠났다. 그 순간 순간마다 나는 15년 전, 이제는 마을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그 농촌 마을에서 딱 한 번 본 그 남자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 마을 농민회장님의 말씀, 여러 사람이 합심해서 그 한 사람을 못 이기냐는 말도 생각이 났다. 물론 그 한 사람 내쫓는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그 한 사람이 있다면 영원히 문제가 반복될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할까...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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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콩장, 콩밥, 콩비지, 콩국수, 두유... 콩으로 만든 음식은 뭐든 좋아한다. 심지어 송편을 먹을 때도 깨설탕이 든 송편보다 콩이 들어있는 송편을 좋아한다. 감옥 가면 콩밥 먹는다고들 하는데, 병역거부로 수감되었을 때 콩밥이 아닌 보리밥이 나와서 '아 이제 다시는 감옥 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 하나, 정말 이 하나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청국장이다. 이상하게 청국장은 맛있지 않았다. 냄새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나는 홍어를 비롯한 강한 냄새로 유명한 음식들을 곧잘 먹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청국장은 맛이 없었다. 밖에서 사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청국장도 별로였다. 굳이 찾지는 않지만 있으면 먹는 정도도 아니었다. 식탁 위에 청국장이 있어도 나는 손도 안 댔다.
그러다가 청국장을 먹게 된 계기가 있다. 입맛이 바뀌어서 먹은 건 아니고,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억지로 먹었다. 평소 견과류나 콩으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라 고기를 끊은 뒤에도 단백질 섭취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옥에서는 달랐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딱히 단백질를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 없었다. 나는 반찬으로 나오는 콩들을 일부러 더 많이 먹기 시작했다. 콩장이나 두부야 원래 좋아하는 음식이니 많이 먹는 게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 처음 청국장을 먹기 시작했다. 맛은 없었지만, 건강하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먹었다. 청국장 중에서도 덜으깨진 콩과 두부를 집중적으로 먹었다. 먹다보니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애써 찾아서 먹지는 않을 거 같았지만, 밥상 위에 올라온 고단백 음식을 마다할 정도로 먹기 싫은 맛은 아니었다. 특히 청주교도소의 청국장이 맛있었다. 두부도 듬뿍 들어가 있어서 나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청국장이 나오는 날이면 정말 보리밥 반, 청국장 콩 반 이렇게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청국장을 먹고 나서 크게 탈이 났다. 출소하기 한 달 전이었으니 계절은 딱 이맘때였을 거다. 추석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고 그랬으니. 어느날 저녁에 청국장이 반찬으로 나왔다. 때마침 비가 오는 날이고 바람은 완연하게 가을로 접어들어 제법 쌀쌀한 날씨여서 따뜻한 국물이 땡길 때였다. 방도 몸도 서늘한데, 청국장 국물은 뜨끈했다. 배도 고프고 왠일로 청국장도 제법 맛있어서 조금 과식을 한다 싶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나는 감옥에서 굉장히 소식을 하면서 밥 양을 줄였는데(지금 먹는 양의 반도 안 먹었다), 가뜩이나 줄어든 위로 과식을 했으니 탈이 나는 건 당연했다. 막 토악질을 할 정도로 많이 먹은 건 아니었으니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밤이 깊어갈수록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되었다. 부글부글하던 배는 진정이 되어 가는데, 이상하게 치통이 오기 시작했다. 몸이 느끼는 통증 가운데 치통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 심장이 뛰는 박동에 맞춰 치통 부위가 시큰거리고, 걸음을 걸을 때마나 같은 부위가 아파왔다. 뇌 가까운 곳의 통증이라 그런지 갈수록 두통까지 동반했다. 그러더니 마치 감기 몸살에 걸린 듯 온 몸이 세게 후려 맞은 것처럼 아프고 힘이 없었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사동 주임에게 말해 감기약을 받아 먹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걸을 때마다 골이 울리니 걸어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그때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이 죄다 여호와의 증인이거나 탈영병 출신들이었는데, 그들은 평소에도 내가 나이가 많다고 나에게 깎듯하게 대해줬다. 평소에는 그런 태도가 그다지 좋게 보이진 않았는데,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니 그들이 나를 대하는 그 태도가 정말이 너무나 고마운 게 아닌가. 제대로 걸어다니지도 못하고, 편지 쓰기는커녕 책과 신문도 못 보고, 오는 편지는 한 번 훑어보고 답장도 다 미뤘다. 감옥에서 아프면 참으로 서럽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앓고나니 감기몸살은 늦여름 더위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는 보름 뒤쯤 가석방으로 출소하게 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은 더러 출소를 앞둔 직전이나 출소한 직후에 별다른 이유 없이 크게 앓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의 긴장이 풀려서 그러는 거 일테다. 내가 아팠던 것도 아마도 출소를 앞둔 시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나는 가석방 출소를 나오지 못할 뻔 했는데, 밖으로는 최대한 표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가 가석방으로 나오게 되니 긴장이 풀리는 폭이 더욱 컸을 것이다. 결코 과식한 청국장 때문에 일주일이나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아팠던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어디 인간이 논리와 이성만으로 인과관계를 정리하는 사람이던가. 내 머리는 출소병을 앓았을 뿐이라고 결론 내렸지만, 내 몸은 그 뒤로 청국장을 아주 강하게 거부했다. 이번에는 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청국장을 먹으면 또 다시 체하고 그때처럼 아플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벌써 아주 예전의 일이다. 몇 년 전 일인지 생각하려면 올해 년도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계산해야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은 청국장을 먹더라도 체할 거 같고, 아플 거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청국장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다. 식당에 갔을 때 기본 반찬으로 나오면 몇 숟갈 먹을 정도지만, 내 돈 내고 사 먹는 음식은 아니다. 청국장만 빼고, 콩으로 만든 음식은 여전히 다 좋다.
지난 주 목요일에 두부집에 갔다가 밑반찬으로 나온 청국장을 한 숟가락 떠먹었더니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오른 김에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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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즐넛과 델리만쥬와 번데기. 내 코를 가장 강력하게 유혹하는 음식 세 가지다. 헤이즐넛과 델리만쥬는 막상 입에 넣었을 때 맛이 코를 배반한다. 헤이즐넛의 향긋함과 델리만쥬의 달콤한은 코에만 머무를 뿐이다. 반면 번데기는 최고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입에 넣어도 맛있는 음식이다. 번데기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많이 있겠지만, 그 음식 가운데 어떤 것들도 번데기보다 내 침샘을 자극하지 못한다. 물론 번데기의 생김새나 여타 이유 때문에 번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내 의견에 동감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번데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 서울 방학동에서 살았을 때 같다. 엄마가 시장 갈 때 종종 따라가곤 했는데, 어린 아이의 발걸음으로는 제법 먼 거리에 위치한 시장이었다. 물론 지금 다시 걷는다면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일 수도 있다. 아무튼 당시 내겐 꽤 먼 거리였으니, 엄마는 나를 데리고 다니려면 내가 칭얼대지 않게 무언가를 입에 물려야 했을 것이다. 그 단골 메뉴가 번데기였다. 지금은 번데기를 주로 종이컵에 파는데, 당시에는 종이로 원뿔을 말아서 거기다 번데기를 담아 줬다. 그게 100원이었던 거 같다. 시장 초입 쪽에 번데기를 파는 노점이 두 군데 있었다. 번데기 맛은 대동소이했는데, 한 쪽에서는 번데기를 사면 굴뚝 모양의 뻥튀기를 두 개,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 끼워줬다. 손가락에 끼워준 뻥튀기를 뺴 먹는 재미에 나는 늘 그 집에서만 번데기를 샀다. 2002년 초겨울, 나는 총학생회선거에 후보로 나섰다가 우리 학교 역대 최다표차로 떨어지고 바로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출마한 사회당 김영규 후보 선거운동원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라도를 돌 때였다. 새벽에 일어나 목포의 삼호 조선소 앞에서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선거 운동을 한 뒤, 무안으로 올라갔다. 점심 먹기 전 어느 장터에서 선거 유세가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바닷 바람을 맞으며 선거운동을 했던 터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무안 장터에 도착해서도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고 몸은 좀체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달달달 떨면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돌아보니 번데기를 파는 아저씨였다. "학생들 춥지. 이거 하나씩 먹고들 해. 고생이 많네." 번데기를 세 컵이나 떠서 주시는 게 아닌가. 나이 많은 선배들은 늘상 92년 백기완 선본 때 이야기를 하며 이름도 모르는 시민들이 이러저러한 지원과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았고, 그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어온 우리는 전국을 돌며 우리끼리는 신났지만 사람들의 무관심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쓸쓸하고 씁쓸한 마음이 제법 쌓였을 때였다. 그 번데기가 우리를 응원하는 시민의 마음인 것처럼 느껴져서 몸보다 마음이 먼저 녹았다. 따뜻한 번데기를 한움큼 먹고 나니 손끝 발끝이 따뜻한 온기로 저릿한 느낌이었고, 그 아저씨의 연대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샘이 시큰거렸다. 잘 먹었다고 인사를 드리고 가려는데, 아저씨가 우리를 보며 환히 웃으시며 이렇게 말했다. "응~ 원래 한 컵에 2000원인데, 3컵에 5000원만 받을게." 이게 뭐지?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로를 쳐다봤지만, 누구도 적절한 대꾸를 하지 못한 채 멀뚱거리기만 했다. 당황해하는 우리를 보더니 아저씨는 마치 결정타를 날리는 맹수마냥 한마디를 더 보탰다. "아니, 이 사람들이, 정치하겠다는 양반들이 시장에서 음식 사먹고 돈도 안 내려고 그래?" 이번 목소리는 좀 더 컸고, 우리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울며겨자 먹기로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를 모아 아저씨에게 줄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쓰디쓴 번데기였고, 아마 앞으로도 그보다 쓴 번데기는 먹을 일이 없을 거 같다. 한편 번데기 먹기의 위기 상황도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하면서 나는 고기를 끊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고기를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다만 번데기를 먹지 못하게 되는 건 너무 서러운 일이었다. 고기를 끊고 번데기를 못 먹어 낙담하고 있는 내게 어느 친구가 말해줬다. "야 어차피 너 비건은 아니잖아. 생선도 먹고, 유제품도 다 먹잖아. 번데기는 포유류나 조류가 아냐. 어류 먹는데 곤충 못 먹을 거 없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그 친구 덕분에 번데기를 끊지 않아도 되는 일이 너무나 고마워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은혜는 잊지 않았는데, 문제는 그 친구가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렸다. 어제 소래포구 가서 배터지게 먹고 풀빵까지 사 먹느라, 번데기를 보고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 번데기에게 못내 미안해서, 내 인생의 번데기들을 한번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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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장, 두부부침, 감자볶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락 반찬 3총사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은 편이어서 엄마가 싸준 도시락 반찬은 대체로 맛있는 편이었는데, 나는 그 가운데서도 저 세 가지를 가장 좋아했다. (물론 우리 엄마 기억은 다를 수도 있다. 돈까스 제육볶음 따위를 가장 좋아했다고 기억하실지도 모른다.) 이 반찬들은 지금도 무척 좋아하는 반찬인데, 혼자 살면서도 두부부침과 감자볶음은 자주 해 먹었다.그에 비해 콩장은 만드는 과정이 상대적으로 조금 번거로워 한 번도 직접 해본적은 없다.
사실 도시락 싸들고 다니던 시절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좋았던 건 콩장이다. 맛 때문이 아니라, 경제성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콩장은 다른 반찬에 비해 음식의 부피가 작고 간이 배어 있다. 반찬통 가득 두부를 채워도, 몇 숟가락 반찬이 안 된다. 감자볶음은 케챱을 뿌리기는 했지만 슴슴해서 한 숟가락에 많은 양을 반찬으로 먹게 된다. 그에 비해 콩장은 도시락 먹다가 반찬이 부족할 거 같으면 밥 한 숟가락에 콩 한 알만 먹어도 되기 때문에 밥과 반찬의 비율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나에게 안성맞춤인 반찬이었다.
우리 엄마가 콩장이 가장 맛있긴 하지만, 나는 대체로 어디서 먹는 콩장이든 다 좋아하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콩장이 있다. 바로 수원구치소에서 먹은 콩장이다.
병역거부로 수감되었던 나는, 수감되기 직전 평택 대추리 싸움을 하다가 평택 경찰서 앞에서 연행된 일이 있다. 그 재판을 받으러 군산교도소에서 수원구치소로 옮겨와 재판을 받는 6개월 가량을 수원구치소에서 살았다. 병역거부자들은 일반적으로 기타 잡범으로 분류되는데,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로 재판을 받아서인지, 수원구치소는 내게 공안수들에게 주는 갈색 표찰을 주었다. 감옥들은 대체로 공간이 부족해서 아무나 독방을 주지 않는다. 빽이나 권력이 있거나 공안수처럼 요주의 인물이어야 독방을 쓸 수 있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 집회에 참가한 것이 공안수가 되어야 할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처럼 온 공안수 딱지를 그냥 보내긴 아까웠다. 당시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반복되는 텔레비전 소리와 방 사람들을 미워하는 내 자신에 대한 열패감으로 무척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텔레비전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탈출할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고 독방 신청을 했다. 겨울도 지났으니 독방이라해도 아주 춥지는 않을 거 같았다.
독방에 오고 보니 모든 것이 다 좋았는데 한 가지 밥 먹을 반찬 보관이 아쉬웠다. 당시에는 식판에 밥과 국, 김치를 포함한 반찬이 세 가지가 나왔다. 영치금으로 멸치볶음이나 김, 마늘짱아치 들을 사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혼자서 밥을 먹다보니 멸치볶음이나 마늘짱아치를 사서 먹으한 끼에 그걸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남겨뒀다가 나중에 먹어도 되지만, 굳이 사먹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보니 반찬 가짓수가 너무 없었다. 어쩌다가 돈까스나 햄 같은 것이라도 나오면 채식을 하는 나는 김치와 나머지 반찬 하나 만으로 먹어야 하기 일쑤였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반찬이 바로 콩장이었다. 콩장이 나오는 날이면 음식을 배식하는 소지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콩장을 한 그릇 가득 받는다. 고기 반찬 나올 때 내 몫을 소지한테 주곤 했으니 그 정도 부탁은 흔쾌히 들어줬다. 국 그릇에 하나 가득 받은 콩장은 못해도 하루 세 끼 반찬이 되었다. 마지막 끼니쯤 되면 냉장고도 없는 감옥에서 그냥 뚜껑만 대충 다른 그릇으로 덮어 보관한 콩장이 쉬려는 기미가 보인다. 그럴 때면 아예 콩장에 밥을 비벼 이게 콩밥인지 밥콩인지 모를 정도가 된 밥을 먹곤 했다. 달짝지근한 콩을 한입 씹으면 고소한 맛이 밥에 배어든다. 살 빼려고 과자나 다른 군것질거리를 다 끊고 있을 때여서, 달달하고 고소한 콩장은 단백질 공급원일뿐만 아니라 좋은 주전부리기도 했다. 수원구치소는 내가 지낸 네 군데 감옥 가운데서 음식이 가장 형편 없는 곳이었는데도 그 콩장만큼은 맛있게 먹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평을 하자면, 너무 딱딱하게 조렸고, 단 맛은 조금 약한데, 그게 담백한 느낌이라기보다는 꼭 필요한 맛이 부족한 거여서 다른 곳에서 먹는 콩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원구치소에서 나오는 다른 반찬에 비하자면 군계일학이었고, 마치 다른 팀에 가면 중심타선에 들지 못할 성적이지만 꼴찌팀 4번타자로 고군분투하는 그런 맛으로, 내가 먹은 콩장들 가운데 내 기억에 가장 깊게 남아 있다.
오늘 점심, 엄마가 싸준 콩장에 도시락을 먹다 문득 떠오른 수원구치소의 콩장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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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별별 책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아주 많이 읽는다. 나는 그 사람들만큼 많이 읽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보고 싶은 책은 챙겨보는 편이다. 나는 왜 책을 읽을까? 한번도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져본다. 질문을 던져야 생각을 하게 되니까.
1. 내 경험을, 내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다. 누구나 그렇듯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참 많다. 그 가운데 내가 느끼기에 나 스스로 가장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정체성은 두 가지다. 병역거부자와 노동자. 나는 특히 이 두 가지 정체성에 입각해서 내가 한 경험들과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다. 병역거부자로 겪은 일들과 노동자로 겪은 일들은 참 많이 다르다. 그 둘 사이 정체성이 달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만약 같은 일을 겪는다 해도 다른 양상으로 겪을 것이고 내가 느끼는 것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병역거부자로서 무언가를 이해하고 말하는 것보다는 노동자로서 내 경험을 이해하고 말하는 게 더 어렵다. 뭔가 비슷한 언어는 있지만 온전히 내것이라고 느껴지지가 않는다. 내 삶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조금은 부족한 기분이 든다.
2.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길을 찾고 싶다. 추상적인 차원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나이 먹고 늙어갈지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서 밥벌이를 할지를 알고 싶어 책을 읽기도 한다. 전자의 고민은 죽을 때까지 끝이 없는 고민이다.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정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계속 고민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독서는 아무래도 인문서나 문학작품, 혹은 롤모델로 삼을만한 사람이 쓴 책이나, 그런 사람을 다룬 책을 읽는 것이겠지. 후자의 고민은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책들이다.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할지는 모르지만, 그걸 찾아가는 과정과 찾고 난 뒤에 그 일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지를 알려주는 책들을 읽게 되겠지.
3.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의미가 있음 좋지만, 재미만 있어도 좋다. 재미, 혹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본능적으로 나쁜 일이 아니다. 그 일이 나쁜 일이 되는 것은 재미 이외에 다른 가치들이 가면을 쓰고 끼어들기 때문이다. 오락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떠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재미를 위해 읽는 책들도 있다. 영화나 게임이나 수다 여하튼 재미를 위한 어떤 것이 재미 이외에 다른 것도 선사하듯이 오로지 재미를 위해 읽은 책도 다른 즐거움까지 선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재미만 선사해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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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에 가는 게 아니라, 감옥에 간 사람이 죄인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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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파주에 살지만 병역거부를 했을 당시에는 부천에 살았다. 그래서 관할 구치소인 인천구치소에 수감되었다. 2일 동안 신입방을 거치고 들어간 신입방의 봉사원(방장)은 인천 토박이 아저씨였고 내 또래로는 나보다 3살 많은 사람과 대여섯살 어린 사람이 있었다. 서른 살 먹은 형은 가스 불다가 들어온 사람이었는데 왜 들어왔는지 말하기를 창피해했다. 가스는 뽀다구가 안 난다는 거였다. 내 생각에는 폭력이나 살인, 사기 이런 것보다 남에게 해끼치는 일이 덜한 거니 더 부끄러워할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창피해했다. 그 형을 보고 있자니 3년전 영등포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노랑머리가 떠오른다. 노랑머리는 발음을 살짝 더듬고 발을 절었는데 자기 말로는 본드를 너무 많이해서 그렇다고 했다. 오토바이를 훔쳤는데 본드하고 있다가 쫓아온 경찰에게 잡히는 바람에 유치장에 왔다고 한다. 청주교도소 미결방에서 만난 어떤 아저씨는 향사범(마약)이었다. 원래 향사범들은 다른 재소자들과 같은 방에 두지 않는데 그 아저씨가 왜 미결방에 다른 재소자들과 같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아저씨는 자기 친구에게 속아 자기도 모르게 마약 운반을 하다가 잡혔다고 했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보안과 소지로 뽑혀 갈때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는 그 아저씨한테 네루다 시집을 주고 왔다. 멋드러진 양장본이었는데, 그 아저씨가 갖고 싶어하는 눈치를 여러번 보냈었다.
감옥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에 오는 게 아니라 감옥에 온 사람이 죄인이 된다' 감옥 안에는 정말 죄지은 사람도 있지만 누명을 쓴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법적으로는 전과자지만 과연 우리가 그에게 범죄자라고 손가락질 하는 게 합당한가? 법적으로는 죄가 되지만 내 상식으로는 이 사람이 세상에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파업노동자들, 혹은 비폭력직접행동을 펼치다 연행되는 평화활동가들이 범죄자인가? 병역거부자는 명백하게 현행법으로는 범법자이지만 다른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거부하는 양심을 과연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오히려 감옥에 오지 않았다. 그들은 누리끼리한 기결복 대신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철창 안이 아니라 텔레비전 안에 있었다. 우리 사회 범죄를 규정하는 법이라는 게 가난한 사람들이 죄인이 되기 쉬운 구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교도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불공평한 법의 적용마저도 심하게 왜곡되어 적용되고 있었다.
가스를 마신 그 형은 당시 재판에서 실형을 면했을까? 아니면 6개월 정도를 받아 재판 받느라 구치소에서 머무른 시간으로 다 차감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김무성의 사위처럼 집행유예를 받진 못했을 거 같다.
역시나 죄 지은 사람이 감옥 가는 게 아니라 감옥에 간 사람이 죄인이 된다.
나는 사위가 집행유예를 받은 것에 대해서는 도의적인 책임이 김무성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물론 직접 사주한 일이라면 직접적인 책임이 있겠지만 지금 정황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위가 마약 한 것 자체를 김무성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병역거부 한 것을 울 아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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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래군이형 면회를 다녀왔다. 나는 감옥 간 박래군을 별로 걱정 안 하는데, 감옥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지독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밥 잘 챙겨먹고 운동 규칙적으로 하고 술 담배 안 하니 건강해질수도 있고, 컴퓨터 스마트폰 없으니 책 읽으면서 생각도 많이 할 수 있다. 물론 케바케여서 감옥에 가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안좋아지는 경우도 있다.
암튼 래군이형은 잘 지내보였고, 그래서 원래부터도 없던 걱정 앞으로도 없을 듯.
<A가 X에게-편지로 씌어진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특별히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고, 소설을 읽고 싶어서 다시 빼들었다. 예전이 읽었던 부분 뒤 쪽으로 읽는다. 감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자연스레 내 감옥 시절이 떠오른다.
감옥 안에서는 모든 감각과 모든 사고가 예리하고 예민해진다. 평소에는 보지 못한 것들,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때 나는 진은영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보고 있었는데, 시집 제목과도 똑같은 제목을 가진 표제시가 마음에 들어 내 나름으로 흉내는 내 보았다. 감옥에서 나만의 사전을 만든 것이다. 사전이라고 하기에는 단어가 몇 개 없지만, 이 단어들이면 당시 수원구치소에서 내 일상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감옥에서 만든 나만의 사전
그리움: 보고 싶은 사람들을 자꾸 떠올리는 일. 그러나 자꾸만 희미해져가는 얼굴들. 외로움: 1.31 평 좁은 방안에서도 철문 밖 넓은 세상에서도 내자리를 찾을 수 없다. 고독: 이 방 안에서 살아있는 건 나와 작은 화분하나. 그런데 화분이 시들어간다. 사랑: 하루종일 오지 않는 너의 편지를 기다렸다. 그래도 언제나 다음날이 또 기대된다. 설레임: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롤러코스터. 떨어질 줄 알면서도. 미움: 내 안에 살고 있는 보기 싫은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내다. 혹은 다른사람에게 투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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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VS합법, 폭력VS비폭력 구도의 토론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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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에 대해서 폭력 집회다 불법 집회다 말이 많은 거 같다. 토요일 나는 광화문에 못가서 경찰이 어땠는지 시위대는 어땠는지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다만 내 친구들의 이야기와 그동안 정부와 공권력, 보수 언론이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에 대한 경험으로 추측할 뿐이다. 합법, 불법에 대해서 그리고 폭력과 비폭력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다. 1. 먼저 불법과 합법. 역사적인 사례들을 예로 들어보자. 합법적인 행동 철도노조 파업, MBC노조 파업, 통합진보당 해산, 나치의 집권 불법적인 행동 3.1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516쿠테타, 전두환의 쿠테타
민주주의를 촉진 철도노조 파업, MBC노조 파업, 3.1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민주주의에 역행 통합진보당 해산, 나치의 집권, 516쿠테타, 전두환의 쿠테타
어떤 행동이 불법인지 합법인지는 그 행동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냐와는 별개다. 합법적이지만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동도 있고, 불법이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확장하는 행동도 있다. 심지어 시민불복종은 불의의 법을 고발하기 위해 일부러 법을 어기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펼치는 방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시민불복종으로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미국의 흑인민원 운동가들이 펼친 불복종 시위가 있는데, 우리는 아무도 그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백인전용 식당에 들어가서 앉은 것이 당시 법을 어긴 불법적인 행동이었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불법 행동만이 더 뛰어난 투쟁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법이 정한 절차를 거친 노동조합의 파업처럼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펼치는 투쟁도 굉장히 효과적일 수 있고, 때로는 불법을 무릅쓴 투쟁 방식은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를 제한하기도 한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불법시위와 합법시위를 도덕적인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 어떤 행동이 민주주의를 위한 행동인지, 그리고 행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2. 무엇이 폭력인가? 나는 기본적으로 폭력 투쟁보다는 비폭력 투쟁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성공가능성도 높으며, 투쟁 과정 또한 민주적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비폭력일까?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예컨대 (옳고 그름의 문제는 따지지 않는다면) 쇠파이프로 전경을 때리는 것은 폭력이라는 데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태극기를 불태우는 건 폭력일까 비폭력일까? 전경 버스는 부수는 건 폭력일까 비폭력일까?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고, 강정마을에서 활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평화활동가 앤지 젤터는 1990년대에 동료들과 함께 공군 기지에 잠입해서 망치로 호크기를 때려부쉈다.(전쟁없는세상 37호: 비폭력 직접행동 무죄 사례 살펴보기) 한국이었다면 그 행동을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봤을까? 엔지 젤터와 동료들은 그 행동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비폭력 평화운동의 상징인 간디는 칼을 든 강도 40명에게 둘러싸인 사람이 칼을 들고 방어한다면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행동에 대해 폭력과 비폭력을 명확하게 가르는 절대적인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집회나 시위가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규정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더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을 수 있고(소수에게 집중된 힘에 기반한 저항 운동은 또 다른 권력 집단을 만들게 된다),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우리의 저항 속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모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가지고 논쟁할 게 아니라, 어떤 저항이 우리에게 가장 유용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지를 가지고 토론해야 한다. 태극기를 불태운 행동이나 전경 버스에 물리적인 힘을 가한 행동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비폭력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누군가는 폭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이게 폭력인지 비폭력인지를 따지고 들어가봤자 남는 게 없다는 거다. 우리가 해야할 토론은 그 행동들이 과연 세월호 1주기 집회의 목표에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세월호 1주기 집회의 목표가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를 공유해야 할 것이다. 저항에 나서는 집단이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면 그 저항은 성공할 수 없다.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를 위해 좋은 저항이었는지를 따지고, 목표가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할지를 토론하는 게 생산적이다.
결론은 어떤 저항 행동에 대해 불법인지 합법인지를 따져봤자 그 행동이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고, 폭력 비폭력을 따지는 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거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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