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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화된 눈으로 인권의 보편성과 국제법의 준수를 이야기할 때, 여성과 인권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여성해방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인도의 사티 풍습은 인도의 가족법과 상속제도의 부계혈통주의를 없애야만 철폐될 수 있다. 태국의 아동 성매매 문제는 유럽 관광객의 소비로 부를 창출하는 것을 핵심 동력으로 삼고 있는 태국의 경제구조 자체에 도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특수로 보고, 그 안에 있는 여성들을 서구 여성의 기준에서 호명할 때, 우리는 종종 보편적 인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른 종류의 폭력을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우리"에 대한 기대와 희망, 연대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는 측면에서 강력하고도 유용한 개념이다. 그 때문에 인권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자고 하는 것은 인권의 불가능성을 사고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권이 좀 더 정치적으로 강력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 혹은 성적 선택과 매개되지 않은 관계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러한 관계맺음 자체가 인간이 무엇인지를 결정해 준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관계의 맥락성을 경유하여 구체적인 개입의 지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