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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만점 철거 농성장 유채림, 실천문학사, 2012
235쪽 맞는 말이었다. 농성을 풀고 안 풀고는 구청장을 종용할 일이지 졸리나를 종용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늘 약자를 진정시키는 데만 익숙해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싸움을 하면 힘센 놈을 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힘없는 놈을 붙들고 싸움을 말렸다. 그사이 힘센 놈은 힘없는 놈에게 달려들어 한 대 더 쥐어박았다. 노사가 붙어도 그랬다. 여론은 시종일관 노가 양보하도록 몰아붙였다. 견디다 견디다 급기야 터진 건데, 도대체 노가 양보할 게 뭐가 있나? 그런데도 노는 등 떠밀려 늘 사 앞에 굴복했다. 이제라도 힘센 구청장한테 양보를 얻어내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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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하는 삶-도로시 데이, 평화와 애덕의 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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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하는 삶 로버트 콜스, 박현주 옮김, 낮은산, 2011년 80쪽 우리가 오만함에 맞서 싸우고 있을 때조차 우리 안에 바로 그 오만함이 있으며, 우리 대다수가 내명에 바바라 소령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내게 말해야 했습니다.
95쪽 "때로는 이 생에서 몹시 신중을 기해 일을 처리한 결과가 종국에는 도덕적 실패로 귀결되는 가장 큰 실수가 되기도 합니다."
126쪽 자선 행위는 진저리나는 단어이다. 누가 자선 행위를 원했다는 말인가? 내가 그토록 거대한 전체 카톨릭 기구들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보다 분개를 한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긍지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강한 자각, 인간이기에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193쪽 언젠가 그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농담 반 진담 반이었어요. 자기가 보건부나 교육부나 복지부 장관이 될 수 있다면, 미국에서 가난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겠대요. 왜 그러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죠. 그는 알고 있는 통계를 죄다 나열하면서, 정말 끔찍하지 않냐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는 그가 개별적인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오직 그 모든 숫자와 비율만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 활동가들, 주장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숫자나 통계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개별적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다면 그 숫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늘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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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news.mt.co.kr/mtview.php?no=2012120315050030124&type=1
내가 다녔던 회사 기사가 났다. 나는 이 회사를 두 달 전에 그만 뒀다. 이 기사를 여러 번 봤다. 한 번 봤을 때는 웃음이 났다. 두 번 봤을 때는 짜증이, 세 번 봤을 때는 분노가 치밀었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는 회사의 주인은 직원들이라는 생각으로 하루 6시간 근로제를 도입키로 했다. 도입과정에서부터 직원의 토론과 참여를 보장하는 등 노사 간에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했다"
기사 내용이다. 회사의 주인은 직원이라고 생각한단다. 김정은도 북노선의 주인은 로동인민이라고 생각할 거다. 도입과정에서부터 직원들의 토론과 참여를 보장했다고 한다. 토론? 참여? 그런 거 어디있었지? 평직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6시간제에 대해서 대표이사와 토론은커녕 일방적인 이야기조차 듣지 못했는데? 전체 토론이랍시고 토론 흉내내기 한 자리에선 대표이사는 변산으로 도망가서 참석도 안 하고, 이 따위 토론도 아닌 토론 우리가 할지 말지 결정하자고 이야기하는 자리는 있었는데 그걸 참여와 토론이라고 말하나?
윤구병 대표이사가 회사에 취임한 게 2009년 3월. 3,4,5월 동안 열 손가락으로 다 못 셀 정도로 많이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었다(그 빈자리 덕에 내가 들어갔던 거지) 그때 회사 인트라넷에 어느 직원이 낸 사직서에 그보다 먼저 사직서를 낸 직원이 댓글을 달았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말도 안되는 부당한 인사를 하고, 그 인사 이동도 아무 상의 없이 인트라넷에 한 줄로 통고하는 사장이 있는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아서 내는 겁니다. 이곳에서 내 청춘을 허비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일은 2012년, 바로 지금, 이 기사가 난 이 시점에도 반복되고 있다.
기자님아, 기사 쓰려면 제대로 알아보고 쓰셔야지요. 노동자 몇명 이야기 들으면 뭐합니까. 어차피 회사에서 소개시켜준 노동자들이 무슨 말 할지는 뻔한걸요.
이런 기사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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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앞 함께살자 농성장엘 다녀왔다. 약속이 있어서 낮 시간에 잠깐 있다가 갔는데, 그 사이에 두 군데서 농성장에 취재를 왔다. 조선일보가 불법 농성장 운운하면 톱기사로 다뤄 준 덕에 조금 유명세(?)를 치르는 거 같았다. 불법이라... 갑자기 감옥 안에서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죄가 있는 사람이 감옥에 가는 게 아니라 감옥에 간 사람이 죄인이 된다 감옥 안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대부분은 법을 어기고, 다시 말해 죄를 짓고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와 있는 사람도 분명 있다. 억울하진 않았지만 죄가 없이도 감옥에 갇혀있는 건 우리 병역거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짓기는 했지만, 실형을 선고받을만큼 큰 죄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이 모든 이들은 감옥에서 나가면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게 될 사람들이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리에 대해 폭로한 게 2007년이었으니, 나는 그 소식을 감옥 안에서 들었다. 나중에 김용철이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보니, 이건희가 저지른 잘못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뿐 아니라 사법처리를 받아야 할 심각한 범죄였다. 하지만 이건희는 감옥가는 시늉만을 했을 뿐이다. 한화 김승현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이유가 어쨌든 조직폭력배를 동원해서 사람을 납치하고 스스로 쇠파이프로 위협을 했다. 이건 행위만 놓고 본다면 구치소 폭력방에서 재판 받고 실형을 받아 살아야 할 판이다. 그렇지만 김승현도 구속되는 시늉만 하고 병보석인가로 나왔을 거다. 밤깊은 야산에서 쇠파이프 휘두르던 건장한 아저씨가 휠체어 타고 나가는 꼴이란.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감옥에 안 간다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혹 감옥 가더라도 감옥 안에서 가장 좋은 방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다가 갑자기 아파서 휠체어 타고 나가서 건강이 회복되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10명을 죽이면 살인마가 되고, 1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국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죄인 취급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반면 자잘한 죄를 지었든, 죄를 짓지 않고 억울하게 감옥에 갔든, 감옥에 갔던 사람은 여지없이 죄인이 된다. 아무튼 사람들은 대체로 이건희와 김승현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 천 명을 정리해고한 사장님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반면 카드빚 못 갚아서 감옥에 들어와 있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아저씨는 사람들에게 전과자로, 죄인으로 낙인찍힐 거다.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다 감옥에 구속된 노동자들 또한 죄인 취급을 피해가기 어렵다. 카드빚 몇 백만 원 못 갚은 사람과 수천억을 날려먹은 사람 중에 누가 더 큰 죄를 저지른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짜 죄인들은 감옥 밖에 있었다.
법을 어긴 사람이 죄인인가? 누명을 썼든 아니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죄는 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법을 어기면 죄인이라고 아주 쉽게 생각을 하지만,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법에 따라 죄인이 된다고 쳐보자. 그 유명한 장발장이 있다. 배 고파서 빵을 훔친 사람. 법에 따르면 장발장은 죄인이다. 하지만 이 법이 공정하려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만 적용되고 누군가는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건 법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인 형평성을 잃는 게 아닌가. 누구든 빵을 훔치면 재판을 받고 죄인이 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이다. 부자들은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칠 일이 없다. 이럴 때 절도죄는 형식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거 같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이고 부자들은 절대로 걸려들 일이 없는 형평성을 잃은 법이다. 다른 예도 얼마든지 있다. 당신이 재벌집 아들이라면, 혹은 고위 관료의 딸이라면, 당신은 당신이 주장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와 집회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집시법은 집회 말고는 다른 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만 잡아가는 법이다. 우리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많은 법들이 형식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적용되기 위한 법이다. 또한 법은 늘 변한다. 때로는 좋게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개악이 되기도 한다. 어제 죄가 되었던 일이 내일 죄가 아닐 수도 있다. 병역거부도 지금은 죄이지만, 병역법이 개정되고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면 죄가 아니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죄가 아니었던 것이 죄가 될 수도 있다. 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법이 가질 수 있는 진리의 최대치는 사람이 증명해 낼 수 있는 진리의 최대치밖에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공간에 따라 같은 행위에 대한 다른 법이 존재하고 또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법을 어긴 사람이 내일도 죄인이라는 확신을 누가 할 수 있나? 물론 살인처럼 너무도 자명한, 그에 대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지만 많은 것들은 법이 바뀌는 것에 따라 그 행동에 대한 판단도 바뀔것이다. 게다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법이 유일무이한 게 아니다. 마치 법이란 것이 정말 대단한 절대자인 거 같지만, 우리는 때로는 다른 기준으로 죄의 유무를 판단하기도 한다. 도덕이나, 상식, 종교 같은 것들이 예가 될 수 있겠다. 어떤 군인이 전쟁 시 명령에 따라 적국에 폭격을 했다고 해 보자. 많은 민간인이 죽었을 거다. 그는 실정법상으로는 죄인이 아닐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씻기 어려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할 거다. 사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이런 종교적인 판단이나 도덕적인 판단이 법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잣대가 되어 죄가 있고 없음을 가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잣대들도 법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공간에 따라 다르고 끊임없이 변한다. 법을 어겼더라도 다른 판단 근거들에 의해 죄인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고, 반대로 법은 지켰지만 다른 판단 근거들로 보자면 크나큰 죄를 지은 사람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법만이 죄를 판가름하는 절대 잣대가 아니다. 법을 어긴 사람은 말 그대로 법을 어겼을 뿐, 다른 모든 잣대를 어긴 건 아니라는 거다.
법을 어긴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크게 어긴 큰 죄인들은 죄다 감옥에 있는데, 그리고 그 법이라는 것도 많은 경우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기 위해 태어난 불평등한 것들이고, 오늘 내일 달라서 오늘 죄인이 내일은 무죄일 수도 있다면. 죄를 판단할 때 법이 아닌 다른 여러 잣대들도 있을 수 있다면?
결국 죄인은 죄를 저질러서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타인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왜 어떻게 죄인으로 만드는지 곰곰히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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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폭격-이 풍경이 바로 지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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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들고 다니던 책 <이것이 인간인가>를 드디어 다 읽었다. 몰입도가 높은 책이었지만, 생각할 게 많은 책이어서 한달음에 읽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책 마지막 부분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레비를 잘 모르기도 해서였지만, 암튼 이 구절이었다. "사실 나는 냉소주의자로 치부되는 게 싫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지금 수용소를 떠올리면 격력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짧았지만 비극적이었던 포로 생활의 경험이 길고 복잡한 증언 작가로서의 경험과 합산되어, 그 결과는 분명 긍정적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나의 과거는 나를 더욱 풍요롭고 자신감 넘치게 해주었다." 나는 프리모레비가 자살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살했기 때문에 레비가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물론 저 말 한마디로 모든 걸 알 수는 없지만, 저 대답은 감옥 생활이 힘들지 않았냐고 나에게 묻는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대답과 비슷하다. 때문에 나는 마치 내가 자살을 할 것만 같은 섬찟함을 느낀 것이다. 말도 안 돼! 나는 자살을 한 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데... 문득 레비의 자살에 대한 서경식 선생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치를 닮아가는 이스라엘이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에게 견디기 힘든 수치였을 것이며,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려고 조용한 선택을 했을 거라는 말. 분명 이스라엘은 나치와 너무나 닮았다. 인간이 만든 가장 끔찍한 지옥을 겪은 이들의 후손들이 이제는 스스로 가장 무서운 지옥을 만들고 있다. 지옥이 있다면 어떤 풍경일까? 프리모 레비가 읽은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풍경일까? 아님 프리모 레비가 겪은 아우슈비츠가 지옥의 풍경일까? 나는 이 사진을 봤을 때 지옥을 느꼈다. 2009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폭격할 때 언덕에 올라 구경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출처:미디어스
백 번 양보해서 전쟁이 인간 본성이고, 전쟁이 아예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하자. 전쟁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치자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이 사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종교적인 이유로 전쟁을 하는 것도 이해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 학살하는 것을 불꽃놀이 구경하듯 구경하는 사람이라니. 이보다 더 끔찍한 지옥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의 인간성이 산산이 파괴되는 기분이었다. 이 사진은 2009년 사진이다. 2009년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폭격해서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이 가운데 어린이들도 300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블록버스터 영화 보듯 구경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은 또 다시 팔레스타인을 폭격하고 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덕에 올라 포탄이 떨어지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트위터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학살을 생중계하고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도 국가니 자기를 포장하거나 변명하는 말을 늘어놓을 수는 있겠지. 그게 정당하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트위터를 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건 기본이고, 자기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하고 있는지 무슨 축구 경기 해설하듯 중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저 사진을 맨 처음 봤을 때 처럼. 레비는 자살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레비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치의 희생양이 지금 세상에서 나치가 되어있다. 이런 일은 또 다시 반복될 거다. 정말 끔찍한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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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다닐 때 나는 종종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감옥에서보다 회사 다니면서 더 큰 모욕감을 느꼈어." 이 말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진심이었다. 진짜로 나는 감옥에서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모욕감을 느꼈다. 헌데, 그걸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나는 지금 8주 과정으로 병역거부자를 대상으로하는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에 참가 중이다. 거기서 나온 이야기를 여기다 옮겨 적을 순 없지만, 상담선생님이 해 준 말 가운데 내 정수리를 후려치는 말이 있어서 한줄 적어본다. 위에 잠깐 언급한 것과 연관되는 말이다. 수치심과 모욕감에 대한 말이다.
그 선생님은 수치심의 언어를 모욕감의 언어로 바꿔야한다고 했다. 수치심은 가해자가 삭제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 단다. 무기력에 빠져서 허우적 대는 것조차도 '내가 게으른 거야.'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거다. 그건 가해자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치심을 모욕감의 언어로 바꾸고 가해자를 명확하게 해야한다고 했다. 그것은 남탓 하는거랑은 근본적으로 다른 거라고.
나는 회사 다니면서 모욕감을 너무 많이 느꼈는데, 그게 딱히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확실히 내가 모욕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가해자를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대표이사가 지껄이는 위선으로 포장된 말과 행동에 대한 분노가 모욕감의 원천이었다. 내 스트레스는 내가 못난 탓이 아니고 저 위선자 대표이사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느낀 감정이 모욕감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면? 음... 더 큰 좌절과, 어쩌면 우울증을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감옥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모욕감을 느꼈다고 말할 때는 회사 생활이 감옥 생활보다 더 불행하다는 걸 이야기 한 거 였는데, 모욕감과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생각이 좀 바뀌었다.
감옥보다 회사에서 더 모욕적이었던 것은, 내가 감옥보다 회사에서 더 많이 싸웠기 때문이다. 감옥은 감옥이라고 한수 접고 들어가서 어지간한 문제를 그냥 눈감고 넘어갔지만, 회사에서는 세상에 자기 혼자 진보적인것 마냥 떠들어대면서 행동은 반대로 하는 사장놈이 눈꼴시려서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도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늘 싸운 건 아니지만, 대체로 싸웠고, 싸우지 않더라도 그건 전술적으로 넘어간 거였지 눈감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3년 동안 회사 생활에 한점 후회가 남지 않는다. 노동조합을 만들 일, 회사와 크고 작게 싸운 일, 회사를 그만 둔 일. 아쉬웠던 순간은 있어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후회가 남을 자리가 없다. 나는 내게 모욕감을 심어주는 치들에 맞서 내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기 때문이다.
다시 감옥 생활을 떠올려본다. 모욕감이 들었던 경우도 많지 않지만 수치심으로 남아있는 기억도 별로 없다. 만약 내가 회사 다닐 때처럼 감옥에서도 예리하고 예민하게 교정당국과 맞섰다면?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함께 노동조합을 만든 동료들이 있었고, 우리의 무기인 우리 말을 퍼뜨릴 수 있는 도구가 있었지만 감옥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었지 않았나. 철저히 혼자 싸워야 했을 텐데... 아무래도 감옥과 회사를 병렬적으로 비교하기는 좀 무리인 거 같다.
하지만, 그렇지만,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감옥에서 한 일이 자랑스웠던 적은 없는데, 회사에서 한 일은 더 힘들고 모욕적이긴 했어도 더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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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인가, 우리 집에서 평화밥상 모임을 했다. 오는 애들한테 집들이 선물 환영한다고 구걸을 했는데, 그 가운데 나동이 내 마음을 어찌 알고 화분을 사 왔다. 비가 엄청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합정에서 우리 집(파주)까지 그걸 들고 왔다고 했다. 그 고생도 고생이지만 화분이 무척 예뻤다. 뱅갈고무나무란다. 전혀 예민하지도 않고 물도 자주 주지도 않아도 되고, 물이 부족하면 신호를 보내는데 그때 줘도 괜찮다고 했다. 이런 쉬운 녀석조차 죽인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인 거처럼 말했다. 좀 안심이 되었다. 내가 화분에 신경을 많이 쓰거나 잘 보살피는 성격이 아닌 걸 나도 알기 때문에... 그리고 한동안 화분을 잊고 있었다. 어느날 화분을 보는데 잎사귀가 많이 떨어져 있고 남아있는 잎들도 가장자리가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무슨 병에 걸린 걸까? 아님 물이 부족했나?' 바로 화장실에 가서 물을 듬뿍 줬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잎들까지 떨어질 뿐이었다. 키우기 쉽다고 했는데, 내가 이걸 또 죽인건가 싶었는데, 가지들을 보니 끄트머리에 새순이 돋아나고 있는 게 아닌가. 맨 밑 가지는 새순이 떠져서 아주 작고 보드랍고 앙증맞은 새 잎사귀가 아직 손을 채 다 펴지도 못한 채 있었다. 잎사귀 갈이(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를 하느라 원래 있던 잎들이 다 떨어졌나보다. 며칠이 더 지나서 보니까 아기 손마냥 조그맣던 새로 난 잎이 제법 커져 잎사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색깔은 짙은 녹색보다는 투명한 연두색에 가까웠고, 잎이 얇아서 반투명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말이다. 새롭게 돋아나는 새순들, 꼬물꼬물 자라는 잎사귀들이 보는 일이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 아닐까? 관찰일기까지는 아니어도 자주 들여다보면서 변화를 써 볼까 한다. 그러면서 함께 쓸 수 있는 이야기도 덧붙여 봐야지. 아래 사진은 내 방에 있는 뱅갈고무나무 지금 모습. 맨 밑에 잎사귀 두 개가 우리 집에 온 뒤 새로 난 잎사귀들이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순이 올라오고 있다. 
수원구치소에서 평택 대추리 관련 재판을 받았다. 처음에는 중방(3평, 5명 정도 같이 썼음)에서 지내다가 독방을 요청해서 옮겼다. 원래 독방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나는 집시법 관련 재판을 받는 중이라 공안수로 분류되어 독방에 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24시간 부대낄 일이 없고 TV도 보기 싫을 때는 꺼 놓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뭔가 좀 허전하기는 했다. 사방이 회색빛 시멘트로 둘러쌓인 좁은 공간 안에 살아있는 존재가 나 혼자라는 자각때문이었을 거다. 그래서 국화 화분을 나눠줄 때 나도 하나 달라고 했다. 국화 화분을 벗삼아 지내려고. 그런데 한 달도 채 못 되어서 국화가 죽어버렸다. 물을 너무 많이 줬는지, 아니면 너무 안 줬나? 그것도 아니면 햇볕이 안 들고 통풍도 안 되는 수원구치소 건물 구조 탓인가? 아무튼 너무 쉽게 손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국화 화분이 죽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갑자기 쓸쓸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좁은 방 안에서 시멘트 덩어리 속에서 살아있는 거라고는 나와 저 국화 화분 둘 밖에 없었는데, 국화가 죽었으니 이제 나 혼자만 남았다는 생각이 무섭게 다가왔다. 1년 2개월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외로움, 쓸쓸함 이런 감정을 가장 크게 느꼈을 때가 바로 이때였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거 같은 그런 느낌. 그때 그 느낌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그 뒤론 화분을 키우거나 그런 적이 없는데, 딱히 화분이 죽으면 또 혼자인 기분이 들 거 같아서 그런 거는 아니다. 그냥 단지 내가 게으르고 식물을 키우는 거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이사 오면서 화분을 다시 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하나 생겼다. 저 뱅갈고무나무는 수원구치소에서 만난 국화처럼 그리 보내지는 않을 거다. 한번 잘 살아보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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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길을 가고 있었다. 길은 아주 가파른 계단 길. 계단 옆으로는 난간도 없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어둠. 내 앞에 한 남자가 걷고 있었고 주위는 자동차 다니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이런 길은, 오밤중에 혼자 걷긴 무섭고, 모르는 사람 한 명이 있으면 더 무섭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저 앞에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이 무서운 길에 왜 저러고 있는 거지? 다가가 말을 걸어봤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무서워서 혼자 못 가겠어요. 저 좀 데려다 주실래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무서우면 빨리 가야지 왜 이러고 혼자 앉아있지?' 여학생이 나한테 거짓말을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알겠다고 어서 길을 가자고 했다.
몇 발짝 옮기지 않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몸이 붕 떠서 계단 옆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올려다 보니 그 여학생이 나를 쳐다보며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가 날 밀어 떨어뜨릴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난 널 떨어뜨리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낭떠러지는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리곤 잠이 깼다. 1시쯤 되었으려나. 별로 길게 자지도 않았다. 기분이 묘했다. 좋지 않은 느낌. 답답하고, 옥죄어 오는 느낌. 아, 이 기분은 감옥에 있을 때 느꼈던 기분. 젠장. 이 꿈은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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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던 건지 나름 모범생이었는지 나는 학교 다닐 때 반성문을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우리 부모님이 반성문 따위를 쓰게 하는 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복 받은 일인지 그땐 몰랐다. 반성문까지는 아니어도 반성을 처음으로 강요받았던 건 집회하다가 잡혀가 경찰 조사 받을 때였다. 나를 조사하던 경찰이 조사 말미에 나에게 물었다. “또 집회에 참여할 겁니까?” 그 경찰은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습관적으로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게 겁주기로 느껴졌다. 실제로 내 마음은 갈등했다. 진심을 말하면 괘씸죄로 더 안 좋은 결정이 날 거 같고, 그렇다고 집회에 다시는 참가 안 하겠다고 거짓말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 난 그냥 묵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갈등하는 내 마음을 들킨 거 같아 기분은 무척 더러웠다. 학교도 졸업했겠다, 집회 나가도 잡히지만 않으면 반성 따위 강요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에는 시말서, 혹은 경위서라 부르는 반성문이 또 있었던 거다. 나는 경위서를 지금까지 딱 한 번 썼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편집자로 낸 첫 책에서 표지에 글자와 그림이 겹쳐서 나와서 표지를 모조리 새로 찍어야 했다. 내가 잘못해서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일이라서 회사에선 당연히 일이 어찌 되었는지 경위를 파악했어야 했고, 경위서 제출 요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일의 경위를 파악하는 경위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학교에서 쓰게 하는 반성문, 경찰서에서 쓰게 하는 반성문과 마찬가지로 반성을 강요하는 경위서도 있었다. 어느 직원이 대표이사의 업무지시에 대해 자기 의견을 피력하면서 업무지시를 그대로 이행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대표이사는 그 직원의 글이 자기에게 심한 언어폭력이 되었다며 징계위원회를 소집했다. 노동조합에서 징계를 막았지만, 회사는 노동조합의 동의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경위서 작성을 해당 직원에게 요구했다. 그 직원은 말 그대로 그동안 경위를 정리한 경위서를 써서 냈다. 헌데 상무이사가 경위서를 결재할 수 없다며 다시 쓰라고 했다.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표이사와 다르게 생각한 것이 왜 잘못인지 알 수 없지만, 백번 양보해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반성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잘못하지 않은 것을 잘못했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다만 이 상황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며 경위서를 고쳐 냈지만, 여전히 회사는 다시 써 오라고 했다. 세 번을 썼는데도 반성이 부족하다며, 아주 콕 집어서 이 부분은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써오라는 거였다. 언론노조에 연락해서 도움을 청하니 대법원판례들을 보내줬다. ‘사건의 경위를 담은 경위서라면 몰라도, 반성을 강요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며 반성하지 않는 것이 징계의 사유가 될 수 없다. 다만 스스로 반성하면 정상참작 할 수는 있다.’ 판례들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대법원판례를 회사에 보여주고 나서야 그 직원은 경위서를 다시 안 쓸 수 있었다. 근데 이런 이야기는 우리 회사에만 있는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만났던 어느 노동자는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경위서를 40번이 넘게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잘못을 많이 했냐니까, 노조를 만든 게 회사한테는 가장 큰 잘못이지 않냐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노동자들에게 경위서를 쓰게 하는 사장들이나, 피고인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재판관, 학생들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하는 선생님들이 바라는 게 진짜로 반성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복종을 바라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개기지 않고 말 잘 듣겠습니다.” 이런 태도를 바라는 거다. 그 태도에 굳이 진심이 담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충성을 맹세하라는 게 아니라 복종을 증명하라는 것이니까. 우리 회사 직원은 결국 복종하지 않았다. 대표이사가 바라는 그 한마디를 쓰지 않았다. 덕분에 회사한테 온갖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진심 어린 반성이 담기지 않았단 이유로 여러 번 경위서를 쓰는 동료를 옆에서 보면서 나는 내 양심이 짓밟히고 내 존엄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 병역거부한 양심이 같이 모욕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랬으니 당사자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인권오름>에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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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일을 강요하는 것,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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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는 봄 가을로 변산공동체 울력을 간다. 헌데 이게 의무 참가가 되면서 문제가 여러 번 생겼다.
의무라 하더라도(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의무에 동의했냐는 차치하고라도)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몸이 안좋아서 변산 울력가기 어려우 사람들은 빠질 수 있어야 하는데, 회사에서는 모든 이가 다 가야한다고 고집한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또 안 가는 사람은 안 간다. 아주 강한 원칙이 고르지 않게 적용되는 거다.
실제 작년 가을 울력 때는 큰 수술을 앞둔 직원에게 변산울력 참가를 강요하다가 그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기도 했다. 물론 딱 변산울력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변산울력을 강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회사에서 봄 가을로 변산에 가서 농사일을 돕는 것은 무척 좋은 일이다. 농사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배우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좋은 살아 있는 교육이 강제 의무 교육이 되면서, 실제 변산 울력에 억지로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무얼 배우게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원래는 봄 가을이 모두 의무 참가였는데 올 초에 단체협약을 개정하면서 봄만 의무로 가을을 자율 참가로 바꿨다. 솔직히 개인 생각으로는 봄 가을 모두 자율이 되어야 맞는 거 같지만, 뭐 협상이라는 게 이 쪽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니까... 한 번은 자율로 바뀐 것에 만족했다.
봄 모내기 울력이 바로 내일모레로 다가왔는데, 회사 인트라넷에 공지 글이 올랐다.
이번 울력부터는 휴지, 생수, 컵라면, 과자 따위를 준비하지 않겠다는 것.
저녁 먹고 난 뒤 술자리는 식당에서만 갖겠다는 것이다.
원래 변산공동체는 휴지나 생수 컵라면 따위를 멀리한다.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는 바람직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보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올바르고 가치있는 행동을 사람들에게 강제로 시킨다면 그건 과연 올바를까? 만약 변산 울력이 전면 자율 참가라면 저런 조치들이 문제가 될 게 없다. 동의하는 사람들이 가는 거니까. 하지만 강제로 의무로 직원들을 참여하게 해놓고, 휴지나 생수 비누 샴푸 이런 것들을 쓰지 않는 것이 변산공동체 원칙이라고 우리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하면 그건 그다지 올바른 거 같지 않다. 저런 것들을 줄이거나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렇다.
술자리 이야기는 패스. 이야기할 건덕지도 없다. 무슨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아니고, 회사에서 정해 준 자리에서 정해 준 사람들과 정해 준 시간에 술 먹으라니 나원참.
아무리 옳은 이야기, 훌륭한 삶의 방식도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할 때 옳고 훌륭한 거다. 강제로 억지로 하는 것은 권력이 무서워서 혹은 다투기 귀찮아서 복종하는 척 하는 것 밖에 안된다. 세상을 바꾸려고,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나 자기 삶의 방식에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동화되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더디 바뀌겠지만, 더러는 바뀌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착한 일을 강요하는 거,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을 강요하는 거. 이거야 말로 가장 무서운 독재다. 부패하고 자기 이익에 눈 먼 자들은 독재자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신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자기 자신보다는 세상을 위해 산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이 독재자가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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