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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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기'에 해당하는 글(14)
2015.09.22   왜 우리끼리 누가 더 불행한지를 경쟁해야해?
2015.05.06   직업에 대한 환멸
2013.02.07   평화와 노동의 만남에 대한 짧은 노트
2013.01.02   2012년에 읽은 가장 기억에 남는 책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2012.12.05   이런 기사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2012.10.17   수치심과 모욕감
2012.05.09   경영자의 인사권, 경영권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이다.
2012.02.20   최근에 들은 가장 웃긴 말
2012.02.08   고래 배 속 이물질이 되는 일
2011.12.15   수치심없는 인간-김진숙을 부르던 입으로 자기 회사 노동자들에게 해고를 말하다.


왜 우리끼리 누가 더 불행한지를 경쟁해야해?

두어 달 전에 한 노동운동가를 만나 술을 마실 일이 있었다. 술기운이 제법 달아오를 무렵, 그 노동운동가는 자신이 출판노동에 대해 생각하는 바에 대해 따지듯 말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말에 나도 화가 잔뜩 나 물러서지 않고 댓거리를 했다. 

주로 이런 내용이었다. 자신은 제조업 노동운동이 진정한 노동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며 출판 노동자들 가운데 지금 고공농성을 하는 사람이 있냐고, 아니면 10년 넘게 해고 싸움하는 사람이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요는, 출판노동자들은 예컨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상황과 사정이 좋다는 거였고, 출판노조는 제대로 된 싸움을 한 적이 없다는 거였다. 

이런 식의 비교는 출판 노동 현장과 다른 노동 현장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보리출판사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일을 두고 "그래도 보리 정도면 좋은 회사가 아니냐"거나 "다른 곳보다 좋은 처우를 받고 있으면서 뭐가 부족해서 그러느냐"는 이야기를 내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임금 협상 당시 대표이사는 내게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과 이 땅의 농민들과 북한의 인민들의 곤궁한 삶을 이야기하며 지금 보리 노동자들이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역설했다. "너네는 가진 게 많으니 입 다물라"는 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이런 시각은 지배자들 혹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정부나 보수 언론에서 늘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귀족노조' 프레임이 대표적다. 대기업 노조에서 파업을 하면 돈 많이 받고 좋은 대우 받는 노동자들이 자기 이익만 챙긴다고 몰아간다. 경영자는 자기 이익 챙기는 게 능력이 되는데 노동자는 자기 이익 챙기는 게, 그것도 사회안전망 다 무너진 상황에서 자기 이익 챙기는 게 그렇게 가루가 되도록 까여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는 넘어가더라도, 그 '귀족노조'들이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이유로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불법 운운하는 양반들이 임금 문제로 합법 파업을 하는 대기업 노조는 이기적이라고 몰아가니 참. 그냥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앞에서도 예를 들었던 것처럼 이런 시각이 권력자나 지배자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그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제법 넓게 퍼져있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납득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더 큰 관심과 신경을 쏟기 마련이다. 쌍용차 해고자들이나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문제가 개별 공장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함께 하는 것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콜트콜텍이나 기륭 같은 곳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하는 것은 그분들이 싸워온 그 기나긴 세월에 대한 부채감, 연민, 연대감, 의무감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 더 큰 희생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 더 큰 고통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먼저 연대하고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상대적으로 더 작다고 여겨지는 고통을 감당하는 이들에게 싸우지

또한 전술적으로 더 상징적인 현장이 있을 수 있다. 문제를 개별 현장에서 풀어가는 것보다 더 넓은 차원에서, 예를 들면 국가를 상대해서 풀어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고, 그럴 때에는 상징적인 현장에 가능한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좋은 판단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간에, 그것이 저항과 발언의 자격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행을 경쟁하는 일은 저항하는 사람들을 점점 더 극한으로 몰고 간다. 이미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가고 있지 않나 싶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더 길게 단식을 해야만, 더 많은 사람들이 해고가 되어야만 사회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나는 이런 식의 경쟁이 무섭다. 윤도현 밴드가 부른 박노해의 시 <이 땅에 살기 위하여>를 보면 '300일 넘어 쉬어터진 몸부림에도 대답하나 없는 이 땅에 살기 위하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지금은 300일은커녕 3000일이 넘어도 대답하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극한적인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 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 어려울 뿐더러, 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몸과 마음이 너무 많이 상하게 된다. 


그리고 불행 경쟁은 문자 그대로 불행하게도, 상대적으로 좋은 처지와 상황(사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좋은 처지와 상황도 아니다. 출판노동을 보더라도 몸이 상할 위험은 다른 직종보다 덜할지 몰라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같은 문제들은 오히려 더 심각할 수도 있다)에 놓인 노동자들의 저항을 막고 할 말을 못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는 결국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권력에 맞서는 사람들은 힘을 잃게 만든다. 


한국이 최루탄을 수출하는 나라 가운데 바레인이 있다. 바레인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수백 명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죽었다. 한국산 최루탄이 그 나라에서는 살인무기가 된다. 아무튼, 대한민국이 제 아무리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해도 바레인보다는 나은 상황일 거다. 그렇다고, 우리가 바레인처럼 민주화 운동을 하다 몇백 명이 죽어나가지 않는다고 우리가 싸울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 우리를 보고 "바레인을 봐라. 한국은 그래도 좋은 상황이다."라고 우리를 주저앉힐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그 충고를 깊게 받아들여 우리보다 열악한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는 열심히 연대하고 지지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겪는 일에는 침묵한다면 누가 가장 좋을까?


나는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우리끼리 누가 더 불쌍한지를 경쟁해야 하나?" 

"부당한 것에 대해 말할 자격을 도대체 누가 정한단 말인가?" 

"과연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니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직업에 대한 환멸

입 가진 사람만이 말을 할 수 있다. 

입이 없는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을, 말 비슷한 소리라도 내는 것을

입 가진 자들은 무척 불쾌해 한다. 

그들이 불쾌한 것은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입도 없는 것들이, 감히 말을 하려드는 그 자체가 싫은 거다. 

입이 없는 자들에게도 단 하나 허락된 말이 있다. 

그것은 아부의 말, 찬양의 말, 인간이 아닌 말. 


입 가진 자들만이 말을 한다. 

그들의 말만 상품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 



평화와 노동의 만남에 대한 짧은 노트

나는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하면서 비폭력트레이닝에 여러차례 참여했다. 지나고나서 드는 생각인데 비폭력트레이닝을 했던 것이 노동조합 활동에 도움이 크게 된 거 같다. 노동운동과 평화운동의 접점을 찾고 싶은 마음이 많은데, 운동을 바라보는 철학적인 관점과 방법론 모두에서 비폭력트레이닝이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많을 거 같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 해 보고 싶다. 


차이점

일단 차이점을 먼저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없는세상에서 했던 비폭력 트레이닝이나 외국의 트레이닝 사례들을 보더라도 모인 사람들은 어떤 하나의 목표나 의지에 대해 공감대가 큰 편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아주 구체적인 실천 방안까지 트레이닝에서 다룰 수가 있었다. 하지만 노동조합(노동운동이 꼭 노동조합운동만은 아니지만)은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운동권이 아닌 사람이 대부분이고, 정치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인 직접행동 계획을 일반적인 노동조합에서 비폭력트레이닝 통해 수립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없다. 


비폭력트레이닝 적용지점

그래도 비폭력트레이닝이 노동조합에 굉장히 유용하다고 여기는데 그걸 하나하나 써 보자. 비폭력트레이닝도, 노동조합 활동도 온전히 내 경험을 통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니 내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고민을 더 풍성하게 해 주면 좋겠다. 


-공략하지 말고 낙후시켜라

내가 생각하는 비폭력은 운동의 철학이다. 비폭력은 권력이 작동하는 구조에 일부가 되기를 거부함으로서 폭력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권력을 부정한다. 비폭력은 여러면에서 효과적인데 권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음으로, 권력이 얼마나 추악하고 폭력적인지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노동조합 활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희진이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공략하지 말고 낙후 시키는 것"이 굉장히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싸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싸움을 하되 힘으로 이기려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추악한 집단인지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권력은 무서워할 것이 아니다

나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한 번도 대표이사의 권력이 무섭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비폭력트레이닝에서 '권력 분석하기'를 한 덕이 크다. '권력 분석하기'는 우리가 맞서고자 하는 권력을 떠바치고 있는 것들이 무언지 알아보고, 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공략하는 것이 권력을 무너뜨리는데 좋을지 논의한다. 아무리 대단하고 막강해 보이는 권력도 사실 권력이 유지되게 하는 버팀목들이 있고, 그걸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노동조합에서 이 '권력 분석하기'를 해 보면 좋겠다(근데 그 워크샵 이름이 권력분석하기가 맞나???) 그러면, 노동조합이 맞서는 권력이 대단하고 무소불위의 어떤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되면서 두려움을 떨칠 수 있고, 또 버팀목들 가운데 뭐를 먼저 공략할 건지 계획을 세우기도 좋을 거 같다. 


-가이드라인 만들기 

작년 강화도에서 했던 트레이닝에서 배운 건데, 직접행동을 하기 전에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거다. 철학적인 이야기(우리는 비폭력을 원칙으로 한다, 같은)도 좋고, 아주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경찰이 오면 일단 행동을 중단한다, 같은)도 좋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위에서 내려온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게 익숙하지 스스로 자기 행동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서로서로 가이드라인을 조율하는 연습이 많이 부족한 거 같다. 그래서 자발성에서 운동이 역동적이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이 툴은 참 유용할 거 같다 .

노동조합에서 이걸 해 본다면, 쉽게 생각하면 파업이든 뭐든 행동에 돌입할 때 서로 의견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조합원들끼리 모두가 공감하는 가이드라인을 작성하는 데 유용할 거 같다. 그리고 꼭 그런 투쟁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노동조합의 활동 방향이나 계획을 수립할 때도 적용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미련이 아직 많이 남았나보다. 내가 노동조합 활동할 때 이리 했으면 될 것을. 뭐 그때는 고민도 지금보다는 짧았긴 했지만.... 



2012년에 읽은 가장 기억에 남는 책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꾸리에, 2012


다른 좋은 책들도 많았지만 딱 한 권을 뽑으라면 나는 단연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를 꼽겠다. 

이 책의 주장은 아주 단순하다. 


주식회사의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률 조항에 하나만 추가하면 된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법적으로 철학적으로 썰을 푼 것이 이 책이다. 


이론적인 책이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만 법 용어나 철학 용어들이 조금 생소하긴 하다. 이 책이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내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회사한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경영권은 회사의 고유 권한"이라는 말이었다. 경영권은 무슨 전가의 보도였다. 경영과 아무 관련 없는 사안까지도 대표이사 맘대로 정하면서 경영권이라고 우겨댔다.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에 노동자들의 의견은 하나도 참고되지 않아도, 경영권은 법이 정한 회사의 고유 권한이라며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 (윤구병 대표이사는 철학 책을 한 권 준비한다고 알고 있는데, 농부철학자라는 타이틀 버리고 '사장님 철학자'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 철학을 쓰는 게 옳다.)


확실히 윤구병은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경영자로 잔뼈가 굵은 사람도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경영자들의 철학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경영권은 경영자의 고유 권한'이다. 노동조합이 대표이사를 견제하거나 감시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경영권'을 흔든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었다. 방법은커녕 어떤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는 거였다. 


그때 이 책을 알게 되고 읽었다. 우선 속이 다 시원했다. 김상봉 교수는 논리정연했고 일목요연했다. 물론 안다. 이 논리가 회사와 대화할 때는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논리는, 적어도 상대방이 나와 대화를 하려고 할 때 의미가 있는 법. 김상봉 교수의 생각이 아무리 옳더라도 현실에선 의미가 있을 수 없다. 회사 경영진들이 경영권을 그냥 내어 줄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그래서 김상봉 교수도  개별 기업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상법에 한 구절을 넣자고 제안하는 거라 생각한다. 


이 책이 이론서로서, 현실에서 과연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한계가 분명 있지만, 이 책의 성과는 아주 명확하고 중요하다. 경영자들이 자신의 고유 권한이라고 생각하는 경영권, 그 철옹성을 반박한 책이기 때문이다. 아주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실제로 보리 노동조합에서 노조 창립 2주년 행사로 이 책을 가지고 김상봉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윤구병 대표이사는 김상봉 교수한테 안부를 전해달라며, 보리는 이미 노동자들의 경영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단 말을 전해달라 했다. 보리 노동자들이 경영 참여를 하고 있다는 말은, 운영위원회에 노동조합 조합원인 부장 몇명이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런데 불과 1년 전, 단협에서 사측과 약속한대로 노동조합이 운영위원회를 참관하겠다고 하자, 운영위원회는 경영을 논하는 자리로 경영권은 경영자의 고유권한이니 노동조합이 참여할 권리가 없다며 자기들이 한 약속까지 져 버렸던 윤구병 대표이사가 아니었던가. 확실히 경영권이 뜨거운 감자인가보다. 


혹자는 노동자 경영권은 결국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할 뿐이라고 비판하던데, 어차피 우리 삶의 형식이 자본주의 아닌가. 자본주의를 1%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회사에 임금노동자로 고용되면 안 될 거다. 


이 책이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한 거 같다. 어쩌면 김상봉 교수의 상상력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고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물론 김상봉 교수의 방법론에는 오류나 헛점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그런 오류들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제 경영권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이다. 물론 그냥은 안 돌려주겠지. 그렇담 노동자들이 되찾아와야 할 때이다. 


 


 




이런 기사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http://cnews.mt.co.kr/mtview.php?no=2012120315050030124&type=1


내가 다녔던 회사 기사가 났다. 나는 이 회사를 두 달 전에 그만 뒀다. 이 기사를 여러 번 봤다. 한 번 봤을 때는 웃음이 났다. 두 번 봤을 때는 짜증이, 세 번 봤을 때는 분노가 치밀었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는 회사의 주인은 직원들이라는 생각으로 하루 6시간 근로제를 도입키로 했다. 도입과정에서부터 직원의 토론과 참여를 보장하는 등 노사 간에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했다"


기사 내용이다. 회사의 주인은 직원이라고 생각한단다. 김정은도 북노선의 주인은 로동인민이라고 생각할 거다. 도입과정에서부터 직원들의 토론과 참여를 보장했다고 한다. 토론? 참여? 그런 거 어디있었지? 평직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6시간제에 대해서 대표이사와 토론은커녕 일방적인 이야기조차 듣지 못했는데? 전체 토론이랍시고 토론 흉내내기 한 자리에선 대표이사는 변산으로 도망가서 참석도 안 하고, 이 따위 토론도 아닌 토론 우리가 할지 말지 결정하자고 이야기하는 자리는 있었는데 그걸 참여와 토론이라고 말하나?


윤구병 대표이사가 회사에 취임한 게 2009년 3월. 3,4,5월 동안 열 손가락으로 다 못 셀 정도로 많이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었다(그 빈자리 덕에 내가 들어갔던 거지) 그때 회사 인트라넷에 어느 직원이 낸 사직서에 그보다 먼저 사직서를 낸 직원이 댓글을 달았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말도 안되는 부당한 인사를 하고, 그 인사 이동도 아무 상의 없이 인트라넷에 한 줄로 통고하는 사장이 있는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아서 내는 겁니다. 이곳에서 내 청춘을 허비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일은 2012년, 바로 지금, 이 기사가 난 이 시점에도 반복되고 있다. 

기자님아, 기사 쓰려면 제대로 알아보고 쓰셔야지요. 노동자 몇명 이야기 들으면 뭐합니까. 어차피 회사에서 소개시켜준 노동자들이 무슨 말 할지는 뻔한걸요. 


이런 기사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수치심과 모욕감

회사 다닐 때 나는 종종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감옥에서보다 회사 다니면서 더 큰 모욕감을 느꼈어."

이 말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진심이었다. 진짜로 나는 감옥에서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모욕감을 느꼈다. 헌데, 그걸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나는 지금 8주 과정으로 병역거부자를 대상으로하는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에 참가 중이다. 거기서 나온 이야기를 여기다 옮겨 적을 순 없지만, 상담선생님이 해 준 말 가운데 내 정수리를 후려치는 말이 있어서 한줄 적어본다. 위에 잠깐 언급한 것과 연관되는 말이다. 수치심과 모욕감에 대한 말이다. 


그 선생님은 수치심의 언어를 모욕감의 언어로 바꿔야한다고 했다. 수치심은 가해자가 삭제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 단다. 무기력에 빠져서 허우적 대는 것조차도 '내가 게으른 거야.'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거다. 그건 가해자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치심을 모욕감의 언어로 바꾸고 가해자를 명확하게 해야한다고 했다. 그것은 남탓 하는거랑은 근본적으로 다른 거라고. 


나는 회사 다니면서 모욕감을 너무 많이 느꼈는데, 그게 딱히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확실히 내가 모욕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가해자를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대표이사가 지껄이는 위선으로 포장된 말과 행동에 대한 분노가 모욕감의 원천이었다. 내 스트레스는 내가 못난 탓이 아니고 저 위선자 대표이사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느낀 감정이 모욕감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면?  음... 더 큰 좌절과, 어쩌면 우울증을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감옥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모욕감을 느꼈다고 말할 때는 회사 생활이 감옥 생활보다 더 불행하다는 걸 이야기 한 거 였는데, 모욕감과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생각이 좀 바뀌었다. 


감옥보다 회사에서 더 모욕적이었던 것은, 내가 감옥보다 회사에서 더 많이 싸웠기 때문이다. 감옥은 감옥이라고 한수 접고 들어가서 어지간한 문제를 그냥 눈감고 넘어갔지만, 회사에서는 세상에 자기 혼자 진보적인것 마냥 떠들어대면서 행동은 반대로 하는 사장놈이 눈꼴시려서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도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늘 싸운 건 아니지만, 대체로 싸웠고, 싸우지 않더라도 그건 전술적으로 넘어간 거였지 눈감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3년 동안 회사 생활에 한점 후회가 남지 않는다. 노동조합을 만들 일, 회사와 크고 작게 싸운 일, 회사를 그만 둔 일. 아쉬웠던 순간은 있어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후회가 남을 자리가 없다. 나는 내게 모욕감을 심어주는 치들에 맞서 내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기 때문이다. 


다시 감옥 생활을 떠올려본다. 모욕감이 들었던 경우도 많지 않지만 수치심으로 남아있는 기억도 별로 없다. 만약 내가 회사 다닐 때처럼 감옥에서도 예리하고 예민하게 교정당국과 맞섰다면?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함께 노동조합을 만든 동료들이 있었고, 우리의 무기인 우리 말을 퍼뜨릴 수 있는 도구가 있었지만 감옥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었지 않았나. 철저히 혼자 싸워야 했을 텐데... 아무래도 감옥과 회사를 병렬적으로 비교하기는 좀 무리인 거 같다. 


하지만, 그렇지만,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감옥에서 한 일이 자랑스웠던 적은 없는데, 회사에서 한 일은 더 힘들고 모욕적이긴 했어도 더 자랑스럽다.  



경영자의 인사권, 경영권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이다.

보름쯤 전 출판계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주로 인문, 사회 분야에서 진보적인 책을 내는 어느 출판사가 신입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출판사는 면접까지 보고 합격자를 정해 전화로 합격 사실을 알리며 출근 날짜까지 알렸는데, 바로 다음 날 채용을 취소한다는 메일을 합격자에게 보냈다. 채용을 취소하는 까닭은, 합격자의 트위터 글들을 우연히 봤는데 자기 회사와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했다는 거다. 합격자는 새롭게 취직한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강사를 하고 있던 학원에도 연락해 그만두겠다고 한 상황에서 난데없이 출근도 못 해 보고 백수가 되어 버렸다.

 

여기까지는 출판계에서 뉴스랄 것도 없는 흔히 있는 일이다. 당사자가 이것은 부당해고라며 회사에 찾아가고,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았다면 이 일 또한 아주 조용하게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당사자는 자기가 겪은 일을 알렸다. 회사는 즉각 입장글을 냈는데, 트위터 글을 사찰한 것이 아니고 정식으로 회사에 들어오기 전이니 부당 해고가 아니라는 뉘앙스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고 출판사에 항의를 하고 SNS를 중심으로 출판사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결국 출판사는 자기들이 한 행동이 부당 해고나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고, 피해자가 이 일을 공론화 했을 때 회사의 대응이 여러 면에서 적절치 못했음을 인정하며 당사자와 독자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조를 만들고, 언론노조와 다른 출판사 (노조)분회를 만나 조언을 듣겠다고 했다. 피해 당사자에겐 따로 인격권을 침해하고 정신적인 피해에 대해 보상을 하겠다고 했다.

 

회사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한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대부분 출판사들은 그렇지 않다. 내가 다니는 회사만 해도 그렇다. 회사에 입사하고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나보다 두 달 먼저 회사에 들어온 수습 사원이 짤렸다. 회사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면서 채용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업에 대한 구상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면서, 수습 사원을 정직원으로 채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당사자는 다른 부서라도 좋으니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지만 회사는 듣지 않았다. 회사는 보안 문제와 경영상 판단으로 부득이하게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다고 밝히며,‘특채로 들어온 수습 사원이기 때문에 부당해고가 아니라 계약해지라고 했다. 그 뒤로도 수습 사원이 수습기간을 마치고 정직원이 되지 못한 사례는 몇 차례 더 있었다. 회사는 그 때마다, 이건 부당 해고가 아니라고, 직원을 채용하는 권한은 회사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주장했다.

 

출판 노동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면 이와 같은 사례들은 수도 없이 쏟아진다. 꼭 어느 회사 하나가 잘못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회사들이 비슷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 인턴사원으로 뽑아서 막 쓰고 버리는 건 부지기수고, 수습사원을 여러 명 뽑아 놓고 당신들 가운데 몇 명만 정식 채용 될 거라고 대놓고 경쟁시키는 회사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자기 회사가 저지른 나쁜 짓을 이야기 하다가 다른 회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바닥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구나, 이런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정식 채용이 아니니 부당해고가 아니라는 생각, 수습 사원을 자르는 것은 계약 해지이지 해고가 아니라는 생각, 비정규직을 자르는 것은 계약 해지이지 해고가 아니라는 생각은 출판계 경영자들에게 만연해 있다. 출판사들이 대체로 영세하고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합리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해서 그렇기도 하고, 수습사원이나 비정규직들을 자르는 건 노동법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각해서 그러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경영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이 경영권과 인사권은 법이 보장하는 경영자의 고유 권한이라는 말이다.

 

경영권과 인사권이 노동법에서 명확하게 사용자의 고유 권한이라고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다양한 판례들에서 그것이 사용자의 권한인 것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들이 있을 뿐이다. 혹 법으로 보호 받지 못하는 어느 노동자를 회사가 해고하는 것이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도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법은 넘지 말아야한 최소한을 규정할 뿐이어서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기업이 저지르는 것은 불법이 되는 거지만, 법을 지켰다고 해서 그 행동이 무조건 정당한 것은 아니다. 최저 임금보다 적게 주는 거는 불법이지만, 최저 임금을 딱 맞춰 준다고 해서 그것이 불법이 아니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법은 어차피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일종의 규칙이기 때문에, 당연히도 완벽할 수 없으며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경영자들이 마음대로 휘두른 인사권과 경영권은 노동자들에겐 폭력이 된다. 특히 경영권과 인사권에 따른 결정이 해고라면 더더욱 그렇다. 계약해지든, 채용 취소든, 권고사직이든 이름이 어떻게 붙고 법에 따라 어떻게 나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노동자들한테는 해고다. 정규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수습 사원이든, 인턴 사원이든 노동자들이 스스로 동의하지 않았는데 일터를 잃는 모든 상황은 해고다.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은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이 위태로워지고, 회사에서 잘렸다는 자괴감으로 마음에도 커다란 상처를 입는다. 생존권을 위협하고, 자존감을 망가뜨리는 일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났든 불법으로 일어났든 노동자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경영자의 인사권과 경영권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이다. 쉽게 생각하면 된다. 경영자들이 인사권과 경영권을 지금처럼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이들 목숨이 위태로워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회사에서 잘리면 자기 자신과 식구들의 생존이 쉽게 위협받는다. 우리 나라처럼 사회 안전망이 미약한 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생존권보다 중요한 법은 없다. 경영자들이 부여받은 권리 가운데 노동자들 생존권보다 더 존중받아야할 권리는 단 하나도 없다.



최근에 들은 가장 웃긴 말
단협 자리에서 상무이사 왈
작년 단협에서 노측도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사측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

다른 회사 노동자를 통해 건너 들은 말
노동조합 사장님이 시켜서 만든 거다.  

단협 자리에서 대표이사 왈
우리 회사는 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법을 들이대면서 잘못을 지적할 수 없다. 
-6시간제 시행하면서 휴일근무 수당을 주지 않는 것은 불법이라는 말에 대한 대답. 

맘대로들 지껄이시길. 근데 그런 이야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해 보시지. 
나는 진보입네 하고 다니는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똑같이 말해주세요. 


 


고래 배 속 이물질이 되는 일
그래, 결국 고래 배 속 이물질이 되는 일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남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까칠하고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
그렇게 여겨질 수도 있다.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나를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구역질 나는 악취를 그저 참고만 있을 순 없다.
그래도 걱정이 많이 된다. 그냥 회사 그만 둘까? 엄청나게 많이 생각해봤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만둘 때까지 계속 "그만 둘까?" 이럴거다. 

지금껏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오히려 관계가 더 벌어지지 않을까?
내 생각이 늘 옳은 것은 아닐텐데, 쉽게 내뱉어도 되나?
회사랑 싸우게 되면 결국 싸울 생각이 있고 싸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나뉘게 될 텐데, 그거는 피하고 싶은데...

이제 딱 두가지만 내 앞에 남았다. 
악취 나는 곳을 탈출할 것이냐, 악취난다고 이야기 할 것이냐. 
물론 악취를 없애면 가장 좋겠지만, 악취의 근원을 제거할 수 없다면,
수수하고 은은한 천연향수를 덕지덕지 부려서 아름답게 보이는 이곳이 
안에서 얼마나 썩은내가 나는지 말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다. 

일단은 탈출하기보단 악취가 난다고 떠들어야 겠다. 
탈출은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 

이제 다시 진정 고래 배 속 이물질이 된다. 
뭐 이전에도 이물질이었지만, 그떄는 다른 이물질들이 많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이제 어쩌면 아주 외로운 이물질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물질이 되겠다. 
결코 고래 배속에 파묻히지 않겠다. 




 


수치심없는 인간-김진숙을 부르던 입으로 자기 회사 노동자들에게 해고를 말하다.
이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래서 저치들이 어디 가서 진보연 하지 못하도록,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을 은근슬적 없었던 일처럼 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그런데 너무 게을렀다. 이제라도 다시 다짐하자. 이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기자. 또 언제 다시 글을 쓸지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아니 처음으로 시작하겠다.

수감시절 책으로 만난 서경식과 서경식을 통해 만나게 된 프리모 레비는 내게 큰 인상을 줬다. 특히 인간이 지녀야 할 수치심에 대한 통찰과, 수치심을 지니지 않은 가해자들의 수치심까지 떠 맡고 저들도 인간임을 증명해야했던 레비의 삶이 내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부끄러워해야할 자들이 오히려 떳떳하고 당당한 세상. 우리가 저치들의 수치심까지 담당해야하고, 그래서 저치들은 관심도 없는 '저들도 인간이다.'는 사실을 우리가 증명해야하는 역설. 그 역설적이 상황 때문에 레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는 건 정말 감옥 생활보다 더 지옥이다.

노사 관계가 딱히 좋았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장으로 치닿기 전에는 분명 경영진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경영진이니까, 노동자와는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는 거고, 노동자와 처지가 다르니 갈등하는 거라고. 혹 조금 나쁜 사람이거나 조금 무능한 사람이어도 어쨌든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난 8월에 열렸던 징계위원회를 계기로 나는 더 이상 저치들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사람이라면 수치심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저들에게 '수치심'을 털끝만큼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발단은 이러했다. 어느날 대표이사가 전 직원에게 우리 회사에서 나온 책 리스트를 나눠 주며 읽은 책을 표시해서 내라고 했다. 그런 조사를 왜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 설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몇 몇은 사내 게시판에 대표이사의 지시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몇 명은 그냥 대충 거짓으로 작성해서 내고, 나를 포함한 몇 명은 제출은 하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덧 붙였다.

'전'은 독서실태조사표를 백지로 냈다. 하지만 여름 휴가를 다녀온 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다 제출한 것을 알고 나름의 기준으로 조사표를 작성해서 다시 냈다. 하지만 대표이사인 '윤'은 이미 마음이 상했던 거 같다. '윤'은 '전'에게 왜 백지로 냈는지에 대해 경위서를 쓰라고 했다. '전'은 경위서를 쓰기 전에 A4 한 장 정도 분량으로 간단한 편지글을 써서 전달했다. 그리고 난 뒤 경위서를 냈다.

회사는 며칠 뒤 징계위원회 소집을 알렸다. 징계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고, 다만 '전'이 단협 징계 사안이 "타인에 대한 언어폭력"을 했다는 것과 취업규칙 징계 사유인 "근무에 관한 신고, 제출을 허위로 하거나 신고, 제출, 승인, 허가 등을 받아야 할 사항에 대하여 이를 태만히 한 경우", "소행불량으로 회사 내 풍기질서를 문란케 하였을 때", "동료 간, 상급자에 대한 항명 또는 폭행"에 해당한다고 했다. 노조에서는 '전'의 어떤 행동이 언어폭력이고, 소행불량인지 밝히라고 했지만 회사에는 구체적인 답변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따져 물었다. 사유가 뭐냐고. 대표이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표이사에 대한 언어폭력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어떤 표현이 문제냐고 물었다. '생뚱 맞다, 강압적인 업무지시다, 기계적 충성도 조사' 이런 표현들이 대표이사에 대한 언어폭력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표현들이 다소 감정적이긴 하나 징계사유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소행불량은 뭐냐고 물었다. '전'이 대표이사에게 보낸 편지를 사내게시판에 올려서 전직원이 공유하게 한 것이 문제란다. 헌데 그거 대표이사가 '전'에게 올리라고 시켰다. '전'이 반발하자 대표이사 '윤'은 업무지시라며 강압적으로 이야기했다. 대표이사가 시켜서 한 일을 징계사유랍시고 들고 왔다. 알고 보니 사측 징계위원회 위원들은 대표이사가 그 글을 올리라고 지시한 걸 몰랐나보다.

회사 쪽 징계위원들은 '전'에게 정직 또는 해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가 가관이다. 대표이사가 더 이상 저 직원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란다. 회사 쪽 징계위원들 면면을 보자. 사내 이사인 김, 전교조와 글쓰기교육연구회 활동을 하는 박, 민교협과 한철연 활동을 하는 김, 그리고 농부철학자라고 스스로를 알리는 윤. 우리 사회에 이름난 진보 인사들이다. 노조는 희망 버스 몇명 가냐며 묻고,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대표이사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고 징계위를 열더니 대표이사가 저 직원과는 일할 수 없다고 했다고 정직이나 해고를 해야한다고 한다. 심지어 '박'은 "'전'의 양심은 존중한다. 하지만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 거기에 책임도 져야한다."고 했다. 이 말은 병역거부자들에게 "병역거부 양심을 존중한다. 하지만 법을 어겼으니 감옥에 가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나는 징계위원회를 거치면서 마지막 끈을 잘라 버렸다. 저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적혀있는 끈. 가늘게 이어져 온 그 끈. 그들은 그냥 사장이고, 경영진이고 자본가일 뿐이었다. 사회에서 진보 인사로 존경 받는 저치들. 그들이 회사 안에서도 진보적일 거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갖 위선으로 포장한 그 사람들이 징계위원회에서 보여준 태도와 입장은 정말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게 했다.

하지만 아직 저들은 더 보여줄 것이 있었다. 징계위원회는 노동조합의 반대로 중징계를 못하고 끝이 났다. 회사가 할 수 있는 징계는 노조의 동의를 얻지 않아도 되는 경위서 정도였다. 헌데 징계위원회 다음 날 회사는 '전'을 대기 발령 내렸다. 가서 따지니 징계가 아니라 인사 조치란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징계였다. 우리는 분노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그래봤자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전'을 자를 순 없을테니까. 그런데 이번엔 컴퓨터를 못쓰게 했다. 대기발령인데 어떻게 컴퓨터를 쓸 수 있냐는 거다. 개소리였지만 또 한 번 참았다. 개인 컴퓨터를 가져와서 쓰려고 하니 또 뭐라고 그랬다. 대기 발령이 무슨 뜻인지 모르냐고 . 또 참았다. 책을 읽고 있으니 회사에서 개인 책을 읽으면 안된단다. 개니까 개소리 하는 게 당연하지. 참았다. 압권은 '전'에게 내려진 공식적인 징계인 경위서 였다.

'전'은 경위서를 써서 냈다. 그런데 경위서가 반려되었다.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 다고 다시 쓰라는 거다. 이 사람들은 이걸 무슨 반성문으로 여기고 있었다. 반성문 그게 어떤 건가! 교사들이 학생을 훈육의 대상으로 여기고 쓰게 하는 아주 더러운 글쓰기다. 교육에 대해 고민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 그 반성문. 우리 나라에서 가장 좋은 교육서를 낸다고 자부하는 회사에서, 직원에게 반성문을 강요했다.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다고 다시 쓰라고. '전'은 노조와 상의해서 살짝 말을 바꾸었다. 이 상황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고 대표이사가 언어폭력이라고 느꼈다면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고. 여전히 대표이사는 반성하지 않는다며 다시 써오라고 했다. '전'이 그 당시 내린 판단과 생각이 '잘못'이었다고 써오라고 직접 코치까지 했다. 이 무슨 민주인사에게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경찰도 아니고.

결국 일은 노조가 나서면서 일단락 되었다. 반성을 강요하는 경위서는 잘못이라는 법원 판례를 제출하면서 경위서는 사실관계만을 쓰는 문서라고 못 박았다. '윤'은 노조가 맞지 않는 판례를 들먹인다고 했지만, 결국 경위서를 다시 요구하지는 않았다.

과연 저들은 저렇게 살아도 부끄럽지 않은 걸까? 수치스럽지 않은 걸까? 김진숙을 찬양하던 입으로 자기 회사 노동자에게 해고를 말해도 정녕 괜찮은 걸까? 이소선을 찾고, 전태일을 부르던 목소리로 자기 회사 노동자들에게 치졸하게 굴어도 자기들이 내 뱉은 말들이 부끄럽지 않은 걸까?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서를 낸다면서 훈육용 반성문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해도 저들의 자아는 분열되지 않는 걸까?

저들도 사람이라면 저들도 수치심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걸 찾을 수 없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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