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쪽, 저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 벌레 이야기
분노, 고통, 복수에 비해 용서, 화해, 평화는 우원한 가치로 간주된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 진영이나 여성운동, 평화운동 세력도 후자를 좋아한다. 분노와 복수는 극복해야 할 비정상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탐욕이 아이를 죽였다면, 용서와 화해라는 인간의 '고상한' 욕망이 아이 엄마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감정은 물질이다. 달리 해석될지라도, 크기가 작아질지라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몸에 있다. 가해자의 몸은 고통 경험이 없으므로 온갖 절대자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대로 구원, 용서, 평화라는 관념의 향연을 주관할 수 있다. 초월(超越,dis/embodiment)은 득도가 아니다, 경험 없는 몸은 현실과 무관하므로 구원도 마음의 평화도 쉽다.
반면 피해자의 구원은 '고문하는 자'도 피해자도 지칠 만큼 고문의 노동이 지난 후, 잠시 들이마시는 숨 같은 것일지 모른다. 분노와 평화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누구의 분노, 누구의 평화인가가 의미를 결정한다. 따라서 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분노는 개인의 마음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권력 관계다.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피해자의 분노는 관리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타인에 대한 헤아림, 깊이 있는 지성의 영역에 놓여져야 한다. 나는 용서와 평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두려움을 느낀다. 2차 폭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아이의 죽음보다 더 잔인한 사건은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용서와 치유라는 당위다. 사람들, 심지어 남편조차 피해자가 조용히 하기를 원한다.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을 피해자의 어깨에 옮겨 놓고, 불가능을 감상한다.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옮기는 고된 노력이지, 평화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53쪽, 경험한 나 말하는 나-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차별을 받았을 때, 우리는 갈등한다. 고통과 억울한 심정을 타인에게 말하고 싶지만('하소연이라도 실컷 해봤으면.') 내 처지를 수용해줄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더욱이 상황이 개선된다는 보장도 없다. 소문만 나고 결핍된 인간으로 취급받을 위험이 더 크다.
말하고, 공감받음이 '해결'의 시작이기에 이 욕구는 절실하다. 동시에 낙인으로 인해 사회적 성원의 권리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두려움은 참고 사는 '동력'이 된다. 이 내면의 갈등이 격렬한 나머지 남들이 먼저 알아보는 경우도 많다.
차별 경험을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을 배려한다. 그래서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는 분열된다. 또 분열되어야만 한다. 모든 말하기, 글쓰기가 협상인 이유다. 원래 이 자아 분열 개념은 나치 학살의 생존자들이 자기 경험을 믿어주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자아를 조정하는 고통에서 발전했다. 지금은 모든 담론 행위에 공통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말의 수위와 표현은 달라진다. 조절하지 못하는/않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신이 너무 순수해서 아픈 이들이요, 다른 하나는 전현직 대통령처럼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느 권력자다. 두 경우가 아니라면, 협상의 고통을 정치적 에너지로 삼아야 한다.
74쪽, 손 무덤-손 무덤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라? 내가 몹시 경계하는 말이다. 턱뼈 탑은 한국 사회에서 생각한 대로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종착이고, <손 무덤>은 삶을 재현하고 생각한 예술이다.
(중략)
몸든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몸은 사회적 위치성과 당파성의 행위자다. 예를 들어 '산업 재해 당한 몸', '노동하는 몸', '성폭력 겪은 몸'에서 시작하는 삶. 이것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몸과 의식은 하나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그것은 모두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