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이야기-전화카드 한 장
어떤 노래들은 세월과 상관없이 사랑받는다. 하지만 많은 노래들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멜로디가 촌스러워서 잊히기도 하고, 유행하는 장르가 달라지면서 사람들에게 잊히기도 한다. 멜로디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진 세상과 노랫말이 맞지 않아서 점점 잊혀지는 노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윤종신의 보컬 데뷔곡인 '텅빈 거리에서'의 가사는 그 노래가 발표된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노래 가사에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난 수화기를 들어 너를 사랑해 눈물을 흘리며 말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야윈 두 손엔 외로운 동전 두 개 뿐"이란 노랫말은 공중전화를 써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노랫말이 품고 있는 감정의 결이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혹시나 다른 가족이 전화를 받으면 어쩌나 마음 졸이며 전화를 걸 떄의 그 불안감과 묘한 기대감은 분명 개개인에게 직접 연결되는 핸드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서다.
'텅빈 거리에서'가 외로운 동전 두 개로 전화를 걸던 시절의 정서를 표현했다면, 꽃다지의 '전화카드 한 장'은 동전에서 전화카드로 대세가 넘어간, 그렇지만 아직 핸드폰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던 시절의 정서를 표현한 노래다. 내가 대학을 입학한 99년도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전국민이 핸드폰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우리 과 정원이 한 학년에 30명이었는데,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핸드폰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한 학년에 10명이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99년 내내 아침에 학교에 가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 핸드폰을 장만한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번호를 알려주며 핸드폰을 자랑하곤 했다. 나는 핸드폰을 갖고는 싶었지만, IMF로 아버지가 실직한 마당에 비싼 핸드폰을 사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랬는데, 2학기 때 가을 농활을 갔다와보니 아버지가 선물이라며 LG 싸이언 핸드폰을 주셨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과에서 내가 늦은 편이긴 했지만 내 뒤로 장만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던 것이 00학번이 입학할 때는 신입생들도 핸드폰이 없는 친구가 없었다 1년 만에 완벽하게 보급된 것이다.
핸드폰이 보급되는 속도만큼 빠르게 자취를 감춘 노래가 바로 '전화카드 한 장'이다. 나는 행진곡풍의 투쟁곡보다는 멜로디나 가사가 서정적인 노래를 좋아했는데, '전화카드 한 장'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과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 노랫말이 참 좋아서, 힘들어 하는 친구에게 힘들 때면 내게 전화를 하라고 전화카드 사주기도 많이 했다. 그 당시엔 그게 유행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도 전화카드를 받은 적이 있다.
1999년 5월 15일. 지금이야 5월 15일은 병역거부자의 날로 기억하지만(나와 내 주변만ㅋㅋ)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맞는 스승의날이라고 나는 친구들과 내가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비가 조금씩 흩날리는 날이어서 우산을 쓰고 갔다. 그러고나서 나는 용산역으로 향했다. 당시 용산역은 지금처럼 삐까번쩍하지는 않았고 역 앞에 광장이 있었는데, 그 광정에서 민중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 학교 깃발을 찾아가보니 당시 부총학생회장인 기석이형, 그리고 총학생회 집행국인 진숙누나, 준식이형, 병국이형이 있었다. 아마 백윤이형도 있었을 거고 과 동기 윤정이도 있었던 거 같다. 집회를 한참 하고 있는데 동수형이 갑자기 나타났다. 동수형은 놀러 갔다가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집회하는 것을 보고 온 거였다. 평소같은면 1호선 노량진 역에서 내려서 마을버스를 탔을 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냥 용산역에 내리고 싶었다고 한다. 내려보니 집회를 하고 있고 우리 학교 깃발을 보고 온 것이다.
집회가 끝나고 시내쪽으로 행진을 했다. 남학생들은 사수대로 나오라고 해서 나와 동수형이 사수대에 나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나는 겁이 참 많아서 사수대 나가는 일이 늘 두려웠고, 사수대에 나가서는 집회가 충돌없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사수대라고 해봤자 성별만 남성일 뿐 나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잔뜩 들어와 있는데다가 그냥 맨손이어서 뭘 사수하려해도 사수할 도리가 없으니 더욱 겁이 났다. 우리 앞에 서 있는 전투경찰의 열이 갑자기 가운데가 갈리면서 조금 다른 복장을 한 전투경찰들이 우리 앞으로 나섰다. 겁먹은 내 표정을 봤는지 동수형은 걱정안해도 된다고 했다. 이렇게 스크럼을 짜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면, 시민들이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경찰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했다. 동수형은 평소 우리 과 최고의 사기꾼 뻥쟁이지만 그때 만큼은 동수형의 말이 물에 빠진 내게 지푸라기가 아니라 튼튼한 항공모함처럼 느껴졌고 벌벌 떨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동수형은 내게 뻥을 치지는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틀린 말을 한 거였다. 경찰이 갑자기 달려들어 사수대를 때리고 잡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혼비백산해서 경찰을 등지고 무턱대고 마구 도망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내 옆 사람들이 경찰에게 잡혀가고 나도 바로 뒤까지 쫓아온 경찰에게 곤봉으로 등짝을 한 대 맞았다. 본대오와 사수대는 순식간에 뒤섞였고, 급하게 달리다보니 여기저기서 넘어지는 사람이 생겼다. 그러던 와중에 내 바로 앞에서도 여학생 한 명이 넘어졌다. 워낙 속도를 내서 달리고 있었기 떄문에 나는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다. 피하려고 몸을 움직였다간 나 또한 그 여학생에 걸려 넘어질 판이었고, 내 등짝을 후려갈긴 경찰은 여전히 바로 뒤에서 나를 쫓아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두눈을 질끈 감고 그 여학생을 밟고 지나갔다. 그 여학생이 경찰에게 잡혔는지, 잡히기 전에 맞았는지, 혹은 내 뒤에 오늘 다른 시위대가 넘어지며 그 여학생 위로 사람들이 탑처럼 쌓이게 됐는지 도무지 확인할 여력도 없이 냅다 뛰기만 했다.
어느 정도 뛰었는지 가늠도 안 되었다. 2선에 있던 사람들이 보도블럭을 꺠서 경찰과 투석전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경찰들도 돌멩이가 날라오자 더 이상 심하게 쫓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저마다 함께 온 일행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동수형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본대오에 있는 우리 학교 깃발로 돌아가봣지만 동수형만 없었다. 무사하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잡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집회가 끝나는 동안까지 동수형은 연락이 없었다.
우리는 정리집회가 끝나고 나서 학교 앞으로 돌아와 황토방이라는 술집에서 뒷풀이를 했다. 잡혀간 동수형 생각이 나고, 혼자 도망친 거 같아 미안한 마음에 술을 달게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둥 마는둥 하고 있는데 동수형과 연락이 닿았다. 까치산 역에 있다는 거다. 분명 용산역에서 집회를 했고 행진하다가 시청 근처에서 흩어졌는데 까치산이라니? 나중에 들어보니 동수형은 당시 경찰들한테 잡혔고, 경찰들에게 길바닥에서 마구 맞았다고 한다. 경찰이 방패로 찍어서 머리가 찢어져 피가 났다고 했다. 실컷 팬 뒤 경찰 한 명이 동수형을 연행해가는데, 역시 우리 과 최고의 구라꾼 답게 머리가 피흐르는 것을 이용해서 현기증이 나서 갑자기 쓰러지는 것처럼 연기를 했다고 한다. 경찰도 놀랐는지 손을 잠깐 놨는데 그 틈을 타서 잽싸게 뛰었고, 경찰이 쫓아오지 못하게 차도를 건너서 아무 버스나 오는 걸 붙잡아 타고 가다가 까치산에 내렸다 했다. 머리를 다쳤다니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잡혀가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그때부터 모두들 즐겁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자 술판은 어느덧 노래판으로 바뀌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고, 시작은 혼자서 하되 결국에는 모든 노래를 다같이 합창을 했다. 그때 내 옆에 총학생회장 영수형이 앉아있었는데, 자기 차례에 부른 노래가 바로 '전화카드 한 장'이었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지갑에서 전화카드를 꺼내더니 전화카드를 내 손에 쥐어주면서 내 손바닥에 자기 핸드폰 번호를 적어줬다. 세상에, 총학생회장이 힘들 때 자기한테 전화하라고 전화카드를 주다니! 당시만 해도 순진하기만 했던 나는 정말이지 감격스러웠다. 뭔가 대단한 것을 인정받은 것만 같았고, 총학생회장과 각별한 사이인 유일한 새내기라도 된 것처럼 설레였다.
바로 다음 날, 학교 앞 공중전화에서 그 전화카드로 총학생회장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카드 한 장' 가사처럼 힘들고 지쳤던 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밥을 사달라거나 술을 사달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사달라고 안 해도 사줄수도 있겠다는 계산 정도는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냥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 전화카드로.
그런데...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길 바랍니다." 수화기 너머로 기계음만 들릴 뿐이었다. 나는 설마, 내가 번호를 잘못 눌렀겠지, 생각하며 몇 번이고 다시 걸어봤지만, 총학생회장은 받지를 않고 한치의 오차도 없는 기계음의 여자 목소리만 반복해서 들렸다.
하긴, 술취한 사람이 전화번호를 잘못 쓸 수도 있지... 덕분에 전화카드 하나 공짜로 얻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전화카드에 대한 노래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