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이야기, 정직한 글쓰기가 가진 힘에 대하여
작년 가을 다른 병역거부자들과 함께 ‘사람마음’이란 단체에서 진행하는 치유프로그램을 들었다. 사실 나는 감옥생활이 상처가 될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회사가 내게는 더 지옥 같았다. 회사를 그만둘 때 사직서에 퇴사 이유를 “탈모 방지”라고 적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치유 프로그램을 듣는 내내 ‘병역거부로 인한 수감 생활이 아니라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하면서 겪은 일들이 오히려 치유가 필요한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치유가 절실했고, 출판계에는 힐링에 대한 책이 넘쳐났다. 공감 멘토로 유명한 김난도 교수나 혜민 스님의 책이 각종 서점에서 2012년 베스트셀러 순위를 다퉜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류의 책들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 책들은 제목부터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아프니까’ 견딜 수가 없었고, 그렇게 ‘천 번은 흔들렸다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고는 결국은 초라한 내 모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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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홈페이지 화면 캡쳐 |
힐링 류의 책 대신, 힘들고 짜증나는 순간 내가 찾는 책은 따로 있었다. 하얀 바탕에 디자인이랄 것도 없고, 본문을 보더라도 화려한 꾸밈없이 소박하고 단정하게 검은 글자들이 주욱 늘어서 있을 뿐인 그 책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이하 ‘글쓰기회’)’에서 다달이 내는「우리 말과 글을 살리는 글쓰기」회보였다. 글쓰기회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목표로 삼고 있는 선생님들의 모임인데, 이 모임 선생님들이 쓴 생활글과 교실일기, 선생님들이 지도한 아이들이 쓴 글이 회보에 실렸다. 이런 글들이다.
오목
경남 밀양 산외초등학교 4학년 이수빈
한 알 한 알 한 알
다섯 개 놓으면 끝인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언행불일치
연제고 1학년 한경호
시험을 갈았다 심하게
엄마한테 말하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엄마가 한 말이 기억났다.
“시험 성적이 낮아도 당당하게 살아라.”
나는 당당하게
엄마한테 시험 성적을 말했다.
의외로 엄마가 웃음을 띄며
“괜찮아, 다음에 잘 치면 되지.”
이 말이 끝나는 순간
엄마는 단소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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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가 펴낸 '우리 반 일용이' |
이 이야기들은 힘이 세다. 크게 두 가지 까닭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솔직한 글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글을 쓸 때 남을 굉장히 의식한다. 멋들어지게 쓰려고 하고 자기를 뽐낼 만한 내용은 부풀리고 과장하지만, 자기가 창피할 만한 내용은 숨기거나 왜곡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선생님들은 기쁘고 슬픈 감정을, 그 감정에 따른 자신의 행동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특수반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시작 10분 만에 수업 분위기를 망쳐버린 장애 학생 지훈이를 자기 성질을 못 이기고 손바닥으로 등짝을 내리치고(‘지훈이’ 118쪽), 하루에 서너 번은 꼭 울고 친구들을 고자질하는 현숙이가 미워서 밥 먹을 때 옆에 와 기다리고 있으면 체할 거 같기도 하다고(‘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278쪽) 고백한다.
나 같으면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지 못했을 거다. 장애 아이를 때린 일을 글로 쓰다니, 그 뒤에 받게 될 비난이 무섭지 않았을까? 미운 학생 하나 없는 선생님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은 그 감정을 스스로 인정하고 남들에게 고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솔직한 이야기들 앞에서 나는 무장해제되고 만다. 내가 쓴 글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거짓과 위선을, 가식적인 글로 포장된 내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솔직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다. 선생님들이 쓴 책이니 학교 풍경과 그 안에서 복닥복닥 지내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가진 힘이 이 이야기들을 가진 두 번째 힘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여러모로 더 많이 마음을 써야 하는 아이들이다. 엄마는 일찍 죽고 새장가 간 아빠와 살 수 없는 형편이어서 고모집에서 눈칫밥으로 살다가 할머니랑 사는 호민이는 자기를 버린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쌓여 선생님한테 심한 욕설을 내뱉는다.(‘나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236쪽) 엄마가 재혼을 하는데 새아빠네 늙은 부모에게 자식 딸린 것을 말할 수 없어 시설에서 지내던 일용이는 엄마랑 같이 살게 되었지만 집에 들어가기 무서워 외박을 하고 그 일 때문에 새아빠한테 맞아 귀두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든다.(‘일용이’, 221쪽) 호민이, 일용이 같은 아이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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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방학을 마친 학생들이 개학일인 지난 달 23일 오전 서울 홍제동 인왕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뉴스1 |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불쌍한 아이들이라고 시혜와 동정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가난은 그냥 삶일 뿐, 비난받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가난과 고통 속에서 비틀거리고 방황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간다. 아이들이 사는 모습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의 힘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가난과 현실 문제들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이 사는 삶을 왜곡하거나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지만, 읽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흠뻑 젖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이토록 힘이 센 까닭은, 글쓰기회의 목표이기도 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책 머리글에서 나오는 것처럼 ‘정직하게 제 삶을 담아서 글을 쓰면 마음이 바르게 자라고, 삶이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게 아닐까? 이렇게 쓴 글은 쓴 사람에게만 힘이 되는 게 아니다. 책에 실린 글을 쓰면서 선생님들의 마음과 삶도 바르게 섰겠지만, 이 글을 읽는 나도 커다란 힘을 받았다.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얻었다. 나도,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해야겠다. 일터에서 겪었던 일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써내려가야겠다. 내 삶을 정직하게 담아서 글을 쓰면, 내 마음도 삶도 바로 서게 되겠지. 내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노동자가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불편한 사람들이 있어서 방해하지도 모르지만, 삶을 가꾸는 글쓰기가 가진 힘이 나를 치유해 줄 거라 믿는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내가 쓴 글도 다른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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